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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May 22. 2019

보고 있어도 꿈 같은 풍경

마성의 도루강과 동 루이스 다리 

강남역 근처 중고서점에서 난생 처음으로 가이드북을 샀다. 포장지도 뜯지 않은 론리플래닛 포르투갈편을 반 값에 팔고 있는 것을 보고 망설임없이 구매했다. 수도부터 큰 도시 순으로 목차가 구성되어 있는데, 포르투는 리스본 바로 다음이다. 
 

책에서 마주한 포르투의 첫 사진은 주황색 지붕이 빽빽한, 왠지 다정(多情)해보이는 도시 전경이었다. 네모 반듯한 고층 건물이 아닌 조금씩 다르게 생긴 주황색 기와 지붕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은 단번에 날 매료시켰다. 
 

"두 눈으로 저 풍경을 꼭 눈에 담고 말리라!"
 



첫 만남 : 이거 실화냐?
 

포르투에서는 조금만 높은 지대에 올라가도 주황머리를 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관광객들의 최고 핫플은 도루강 근처다. 눈이 부시도록 푸른 하늘과 강, 그리고 그 사이에 반듯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질서로 자리한 집들. 보색인 주황색과 파랑색은 서로를 돋보이게 하면서도 이 풍경에서만큼은 너무나 조화롭다. 
 

그제 와이너리 투어를 예약한 뒤 도루강(포르투갈과 스페인 북부 지방을 흐르는 큰 강)이 근처이니 산책 삼아 잠시 구경하기로 했다. 그 산책은 두 시간이 넘게 계속됐다. 바라보는 각도마다 시선을 붙잡는 것들이 있었으니, 말이 산책이지 걷는 시간보다 우두커니 서 있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보고 있는데도 현실 같지가 않잖아..."

"엄청 공들여 지은 세트장 속에 있는 것 같다고..."

"누가 나 여기 발 묶어놓았냐고..."
 

도루강은 그 자체로도 그림이지만 대형 아치형 철교인 '동 루이스 다리'까지 함께 보면 더 명작이다. 포르투 '입덕' 사진이었던 론리플래닛 첫 페이지도 바로 도루강, 동 루이스 다리, 주황지붕 군단 쓰리샷이다. 
 

"Love of my life~ You hurt me♬"


강을 등지게 만든 건 익숙한 선율이었다.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 한 분이 통기타로 퀸의 'Love of my life'를 연주하고 있었다. 강을 따라 즐비한 크고 작은 레스토랑과 바 앞에서는 종종 버스킹을 볼 수 있다. 페트병을 손에 쥔 채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두 명의 아주머니 댄서들, 자기 상체만한 기타를 메고 노래하는 깡마른 곱슬머리 청년,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연주에 집중하는 중절모 기타리스트. 
 

애절한 선율과 가사의 곡을 연주해서인지 생기발랄한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홀로 고요해보였다. 그에 홀린 관광객들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느릿하게 여행의 낭만을 함께 즐겼다. 두 손을 모으고 연주를 감상하다 몇 발짝 떨어져 관찰자처럼 이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는 없지만 모두 옅은 미소를 띠고 기분 좋은 표정으로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프레임이 영화 같다고 느껴졌다. 이 영화의 ost는 'Love of my life'가 되겠고. 
 

"자주 와야지."

꿈이 아니라 생시로 느껴질 때까지.
 




두번째 만남 : 위시리스트 실현!
 

'자주'가 바로 다음날이 될 줄은 몰랐는데, 24시간만에 다시 도루강을 찾았다. 이번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이 곳의 아름다움을 내 방식대로 기록하겠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무겁지만 그림 장비를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이유는 이렇다. 여행은 기본적으로 낭만을 내포한다. 그 낭만이 아름다운 풍경이나 좋은 사람들을 만나 극대화될 때, 그것이 증발하기 전에 그림으로 남겨두고 싶어서. 그리고, 나중에 제자리로 돌아가고 나서도 여행지에서의 그림을 보면 그 때 그 시간과 장소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 때문에. 
 

그림은 어떠한 언어적 설명도 하지 않지만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하니까. 
 

그래서 하루 만에 다시 도루강변에 왔다. 이번엔 동 루이스 다리를 건너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 곳은 가게 대신 보트 선착장이 있다. 몇 십분 간격으로 남색 제복을 입은 직원들이 관광객들을 큰 소리로 부르며 보트 출발을 예고한다. 또 다른 배가 선착할 때까지는 조용하다. 
 

나는 조금 떨어진 바위 위에 앉아 2시간 반 동안 꼼짝 않고 눈 앞의 풍경을 그렸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그대로 맞으며 색연필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종이 위로 행인들의 그림자가 비출 때도, 작은 벌레들이 드러난 발목 위를 스멀스멀 기어갈 때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집중력이 대단해서 그런 건 아니고, 단지 해가 너무 뜨거워서(와장창!).
 

결과물은 이렇다▼




몇 번이 될 지 모를 만남을 기약하며
 

두 번째 만남 이후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또 보고 싶다. 샌드위치를 싸가서 강바람을 맞으며 먹고 싶고, 포르투의 대표 맥주인 '슈퍼복'을 홀짝홀짝 마시며 동 루이스 다리를 구경하고 싶고,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좋아하는 노래를 실컷 듣고 싶다. 분명 어제 위시리스트를 실현했는데 눈 뜨고 나니 새로운 위시리스트가 줄줄이 생겨버렸다. 
 

남은 3주간 얼마나 실행에 옮길 수 있을지. 
 


덧붙임)

오늘 아침 샤워하다 발목이 빨갛게 부어오른 것을 발견했다. 일부러 긴바지를 입었는데 살짝 드러난 발목을 햇볕이 무참히 공격했다. 완전 탔다. 싫진 않은데 너무 간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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