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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May 21. 2019

기승전 기내식이었던 에어프랑스 이코노미석

이코노미석으로 장거리 비행을 한다는 것 

김연수 작가의 여행 산문집 <언젠가, 아마도>에는 이런 제목의 글이 있다. 

"이코노미석은 지상, 아니 천상 최고의 창작 공간"

시간 맞춰 밥 주고, 중간에 입 심심할까 간식 주고, 화장실 마저 가까우니 아무런 방해 없이 몇 시간이고 원하는 만큼 글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에 완전히 설득된 나는 여행 시작 전에 수차례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이륙 후 점심밥을 주겠지. 

그럼 그 밥을 먹고, 양치를 한 다음, 노트북을 펼쳐 글을 쓰기 시작하는 거야.  

너무 집중한 나머지 간식을 줄 때까지도 타자 위의 손가락을 멈추지 않아. 

견과류든, 빵이든, 아이스크림이든 순식간에 먹어치운 다음 남은 글을 써. 

그리고 저녁밥을 먹기 전엔 몇 천자의 원고를 마무리 하는거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시나리오는 반의 반도 실행되지 못했다.



첫 기내식까지만 해도 순조로웠다. 식전에 주는 가볍고 바삭바삭한 식감의 동그란 과자도 맛있었고,

작은 병째 주는 화이트 와인도 '술알못'인 내가 먹기에 너무 쓰거나 달지 않았다. 메인요리였던 '야채를 곁들인 닭고기'도 만족스러웠다. 모든 재료가 부드럽게 푹 익어 소화가 잘 될 것 같았다. 입가심으로 먹으려던 까망베르 치즈가 좌석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서부터 방해 변수가 시작됐다.


두 행 앞에 앉아 있던 한국인 부부의 아기가 발버둥치며 울었다. 기내 승무원분이 벽에 간이 아기 침대를 설치해주고, 부부가 이마에 방울방울 땀이 맺힌 채 조심조심 아기를 눕히는 것까지 구경하니 어느새 이륙한지 2시간 반이 지나 있었다. 


에어프랑스 b777-200은 널찍하고 깔끔했다. 생각보다 좋은 컨디션의 기종을 타게 되니 좌석 간격부터 기내 엔터테인먼트 종류까지 꼼꼼하게 관찰하게 됐다. 

"헐... 앤트맨 있다!"

마블 라이트 덕후가 아직까지 못 본 솔로 무비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앤트맨> 시리즈. 안 볼 수 없지. 


<앤트맨>과 <앤트맨과 와스프>를 차례로 보고 나니(존!잼!), 

"비행시간 7시간 경과라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다 오른쪽 맞은편에 앉아 있는 승객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남성 분이었다. 좌석 테이블을 펼쳐두고 허리를 숙인 탓에 처음엔 그가 자고 있는 줄 알았다. 몇 초 후 그는 고개를 들었는데, 테이블에는 한국어가 빼곡히 적힌 수첩(몰스킨으로 추정)이 놓여 있었다. 희미한 독서등에 의지하여 그는 부지런히 만년필을 움직였다. 몇 분 간격으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허리를 세우고 잠시 허공을 보기도 했다. 


"Ice cream?"

앞을 보니 수염이 정갈한 남자 승무원 분이 플라스틱 상자를 내밀고 있었다. 메로나가 가득차 있었다. 하늘에서 먹는 메로나라니, 익숙한 맛인데도 생소하게 느껴졌다. 다시 맞은편을 바라보니 검은 머리 남성 분은 메로나를 입에 물고(!) 글을 쓰고 있었다. 살짝 찌푸린 미간에서 방해 변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도착을 두 시간 남기고 저녁 서빙이 시작됐다. 내 시나리오엔 지금 쯤이면 주제가 뭐가 됐든 짧은 원고 하나가 마무리 되어 있어야 하는데. 맞은 편을 곁눈질하니 남성분은 눈을 비비며 필기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꽤나 만족스러운 글을 쓰셨나 본데?'

아니, 내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고 다른 승객이었다니(ㅎㅎ).



닭고기와 소고기 중 하나를 골라야 했던 점심 기내식과 달리 저녁은 단일 메뉴였다. 토마토 소스에 졸인 소고기와 매쉬드 포테이토, 푸실리 샐러드, 빵, 그리고 초콜릿 무스. 양은 적었지만 역시나 입에 잘 맞아 남기지 않았다. 조금 짜고 느끼한 것 빼고는 부드러운 식감이며, 토마토 소스와 감자의 궁합이며, 다 마음에 들었다. 


어느새 착륙을 준비한다는 기내 방송이 나왔다. 계획대로 된 건 아무것도 없지만 나름대로 즐거운 장기 비행이었다. 사실 기내에서 글을 쓰지 못한 건 내가 집중력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무엇을 써야 할 지 몰랐기 때문이다. 김연수 작가는 이코노미석이 창작하기에 좋은 공간이라고 했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법의 공간이라고 한 적은 없으니까.


그렇지만 이제 여행이 시작됐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여행 5일차고, 벌써 쓰고 싶은 이야기와 그리고 싶은 것이 한 가득이다. 


서쪽 끝에 있는 포르투갈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불안과 초조가 일상이던 한국에서의 삶과 얼마나 다른 매일을 보내고 있는지, 그리고 '현재'에 올인한 채 살아가는 나의 마음이 어떤지.  


한 달이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탄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눈이 뻑뻑하고 손가락이 아파 노트북을 닫는 그런 상상.  

과연...!


덧붙임)
에어프랑스 인천-프랑스 파리 노선, b777-200 후기 한 줄 요약 
=기내식 존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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