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고기를 먹고 있었다. 클로에와 클로에의 친구 솔렌, 그리고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한국인 H언니와 함께였다. 우리는 집에서 작은 스와레를 하고 있었다. 각자 챙겨 온 디저트를 거하게 나눠먹고 있던 찰나 솔렌이 한 문자를 받고는 우리에게 말했다.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데?
이윽고 H언니도 학교 친구들과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뭐냐, 정말 안 가도 되는 거냐, 대체 무슨 일이냐. 그리고 뉴스를 켰다.
"우리는 전쟁 중입니다."
마크롱 대통령이 휴교령을 선포했다. 학교에서 일하고 있던 솔렌은 숨 죽여 방송을 보다 환호했다. 와, 출근 안 해도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바쁘게 일만 하던 일상에서 잠깐의 숨 돌릴 틈이 주어진 줄 알고 좋아라 했다.
며칠 후 휴교령에 이어 통행금지령이 떨어졌다. 다음 날 식당은 난리법석이었다. 하루아침에 도시의 사람들이 집 안에 갇혀버렸다. 캐시가 냉장고에 잔뜩 쌓여 있는 재료들을 다 버려야 하니 가져갈 사람은 가져가라고 했다. 연어꼬치와 채소들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는데 캐시가 다시 들어와 말했다. 미안해, 포장판매는 된대. 연어꼬치와 채소들은 그대로 다시 냉장고에 들어갔다.
문제는 홀서빙을 담당하는 직원들이었다. 매니저 졸란이 서버들을 불러 말했다.
-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아도 돼.
- 언제까지?
- 몰라.
- 월급은 그대로 나오는 거야?
- 몰라.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퇴근을 했고, 재난은 눈앞에서 시작되었다.
사실 프랑스는 강 건너 불구경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꼴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이미 하루에 몇 천 명씩 확진자가 증가하고, 프랑스에서도 1월 보르도의 첫 확진자를 시작으로 확진자가 2,000명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대응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3월 초가 되어서야 뒤늦은 휴교령을 시작으로 전국에 상업시설 무기한 휴업 명령이 내려졌다.
마트의 매대가 순식간에 텅 비었다. 그 와중에 이동 통제가 예고된 날의 전야 거리는 마지막 밤을 즐기기 위해 쏟아져 나온 젊은이들로 북적댔다. 심지어 그 다음날 마지막 햇살을 즐기기 위해 공원이 가득 찬 풍경은 참으로 낭만의 나라 프랑스답다 싶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프랑스는 안전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었다. 발 없는 바이러스는 천 리도 넘게 간다. 며칠 새 한국은 K-방역으로 전 세계의 칭찬을 받고 있었고 프랑스는 당장 쓸 마스크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졸지에 외노자에서 실업자가 되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월급에 변화는 없었다. 괜히 세금을 30%씩 떼어가는 게 아니었다. 이런 면을 보면 역시 노동자의 권리 하나는 착실하게 챙겨주는 나라가 프랑스였다.
첫 일주일은 좋았다. 유튜브를 보며 운동을 시작하고, 프랑스어도 공부하고, 요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한 칸짜리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혼자였다. 방 안에서 나는 자주 우울해졌고 아주 무력해졌다.
길고 긴 감금의 시간이었다. H언니가 없었다면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H언니는 다나로부터 소개받은 한국인 유학생인데 같은 건물 위층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취향이 아주 비슷해서 좋아하는 노래나 영화가 비슷했고 특히 유머 코드가 비슷해 죽이 잘 맞았다. 휑한 내 방과 달리 언니의 방에는 소파도 있고 포스터도 붙어 있고 드림캐쳐도 달려 있었다. 나는 언니가 아늑하게 꾸며놓은 방을 매우 좋아해서 틈만 나면 위층에 놀러 갔다. 우리는 매일 춤을 추고 떡볶이를 해 먹고 노래를 들었다. 언니가 굶었다고 하면 당장 식빵에 누텔라와 마시멜로를 발라 갖다 주었다. 내가 점심을 걸렀다고 하면 언니는 금방 잔치국수를 만들어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챙겼다. 말라죽지 않게, 아프지 않게.
한 달이 지난 후 통행금지령은 한 달 더 연장되었다. 한겨울 독한 감기처럼 앓고 지나갈 줄 알았던 바이러스는 도무지 사라질 기미를 내비치지 않았고, 여름을 기다리지 못하고 나는 결국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