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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민 Jul 06. 2020

주어진 23일

정리할 수 있는 것들, 비워낼 수 있는 것들



집을 둘러볼 시간이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 집에 애착이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만큼 시간을 쏟아 정성스레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정리하지는 못한다. '30일 지정 휴직자'라는 브런치 매거진의 시작 부분에서 공간, 집에 대한 고민을 가진 시간이 있었는데, 오늘 글에서는 과감하게 비워내고 정리할 수 있는 물건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리해봐야겠다.


옷은 버리려고 하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 몸에 맞지도 않는 반팔 티부터 유행 지난 색상의 반바지, 운동 후 팔부터 들어가지 않는 정장, 군대에서 입었던 추억의 옷, 솔직히 가지고 있으면 입을 줄 알았는데 절대 손이 가지 않는 것들 등등 너무나도 많다. 먼저, 지금 당장 장롱으로 향해본다. 가슴에 어벤져스 캐릭터가 귀엽게 새겨진 반팔티...내가 이런 류를 좋아하는 게 아닌데 입었었다. 자주 입었었다. 빨간 카라티...이건 자주 입지도 않았었는데 아깝지 않다. 어머니가 사다 주셨던 옷들을 얌전히 잘도 입어왔다. 이젠 얌전히 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과감하게 내놨다. 그러고 나서 옷방에 있는 옷걸이를 살핀다. 아무래도 옷걸이에는 내가 자주 입는 것들이 걸려 있기 때문에 딱히 버릴 만한 것을 찾을 수 없다. 다음은 옷 서랍을 확인한다. 음 여기에도 은근히 정리하고 싶은 아이템들이 있다. 잘 입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마구 빼고 있는데 두려운 생각이 엄습한다. '이거 다 버리면 솔직히 입을 게 없는데?' 이런 생각 때문에 계속 가지고 있었던 걸 알면서도 또 그런다. 자체 검열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서랍에는 옷이 많지 않아서 몸에 안 맞는 티셔츠 한 개만 따로 뺐다. 그리고 그 와중에 괜찮은 회색 반팔티를 찾아서 새 옷을 산 것처럼 기분 좋게 옷걸이에 걸어두고 왔다. 아무래도 나보다 아내가 가진 옷들이 더 많고 아이템들도 많기 때문에 아내가 집에 오면 한 번씩 살펴보면서 정리하도록 부탁해야겠다. 그러고 나면 얼마나 더 쾌적해지려나! 물건을 잘 버리거나 정리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이런 작은 시도가 불러올 변화가 은근히 기다려진다.


옷은 이쯤에서 끝내고 이젠 잡다한 물건들을 살펴야겠다. 우선 가장 넓고 수납공간이 많은 거실부터 시작해보자. TV를 올려둔 TV장 안에는 가끔 연결해서 영화를 보기 위한 오래된 노트북과 케이블 선, 그리고 안에서 향기가 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넣어둔 비누 2개가 있다. 그리고 연결된 서랍에는 전자기기와 관련된 제품, 충전잭, 케이블선, 과거 사용했던 기기, 헤드셋, 패드 등이 있는 부분 하나, 아내의 출판사 상품 스티커들이 모여 있는 부분 하나, 설명서와 교관 수료증이 들어 있는 부분으로 크게 3단계로 서랍이 정리되어 있다. 굳이 여기 있지 않아도 될 설명서와 교관 수료증은 따로 빼서 해당 서랍 공간은 비워둬야겠다.


베란다 근처에 있는 장식장의 서랍을 열어본다. 향초가 놓여있는 작은 서랍 한 개, 필름 카메라에 사용할 필름이 놓여있는 작은 서랍 한 개,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조이스틱이 놓여있는 중간 사이즈 서랍 한 개... 음 게임 조이스틱은 꼭 여기가 아니더라도 보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일단 빼본다. 두 개의 큰 서랍을 살펴보니 한쪽에는 그동안 찍고 스캔이 완료된 약 3000여 장의 필름과 쓰지 않는 폴라로이드 두 개, 도통 맞추려 들지 않는 퍼즐 등이 들어 있었고, 한쪽에는 친구들을 불러 같이 먹고 즐기기 위해 구매해둔 여러 보드게임들이 들어 있었다. 보드게임은 이 자리가 딱이기도 하고 버릴 것도 없어서 패스하고 쓰지 않는 폴라로이드는 카메라만 모아둔 장소로 옮겨놓고, 필름만 그대로 누었다. 자질구레한 물건들도 필름 사이에 마구잡이로 놓여있었는데 딱 필름만 가지런히 두니 훨씬 깔끔해졌고 또 새로운 것들을 정리해 넣기 좋아졌다. 


이렇게만 해도 이미 충분히 깔끔해진 느낌인데 방에 있는 책이며, 가방까지 정리하고 나면 활용 가능한 공간이 훨씬 더 늘어날 것 같아서 지치지 않는다. 약 30개 정도 되는 듯한 가방 무더기를 꺼내본다. 에코백, 가죽 가방, 백팩, 크로스백, 아직 뜯지도 않은 증정품으로 받은 가방까지. 영화 부산행의 좀비 무더기처럼 축 져진 상태로 사용될 날만을 기다려온 가방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맞다. 이 가방도 있었지. 저런 가방도 있었고.' 문득문득 추억에 잠길 뻔했지만 냉정해져야만 하는 날이기 때문에 마음을 바로잡았다. 옆쪽에 둔 큰 박스 안에 툭툭 나에게서 팽 당하고 있는 가방들이 안쓰러웠지만 나는 얼음처럼 차갑게 굴었다. 정리할 수 있겠다 생각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니 정리에 자신감이 붙은 건지, 다른 선반에 모아두었던 작은 수첩과 편지, 어느 날엔가 방문했던 티켓, 스티커, 소박한 굿즈가 모두 놓아줘야 하는 시기 같다고 생각했다. 후드득. 선별을 후 분리수거까지 끝내고 나니 믿을 수 없이 널찍한 공간과 여유가 생겨났다. 내가 아까워하고 애정 하지만 막상 필요하지 않은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고 앞으로는 좀 더 합리적이고 냉정하게 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똑같은 수고로움을 언젠가 또 겪게 되겠지만 피할 수 없으니 줄여가야겠다. 비워낼 수 있는 것들과 정리할 수 있는 것들이 우리에게 집착하고 있기도 하고 우리가 관심 없이 집착만 하고 있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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