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랑 잘 맞으시네요

잘 맞는 말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사람의 이야기

by 노난


아침에 일어나니 날이 흐렸다

점심을 챙겨 먹고 승마장으로 향하는데

비가 아주 조금씩 떨어졌다


원장님이 어제보다 한 단계 더

승마인 같은 모습으로 화이트보드 앞에 서있었다

하얀색 승마바지에 딱 붙는 재킷을 입었다

어제는 학생이 너무 많아서 못 탄 말을

오늘은 타시려는 걸까

보드에는 오늘 학생들의 예약 현황과

말의 이름이 적혀있다


내가 오늘 탈 말은 루이

둘째 날이라고 벌써 원장님이 혼자 마방에 가서

말을 데리고 원형 승마장으로 가보라고 했다

나 혼자 마방으로 간다니!

샤워를 마치고 물기를 말리는 중인 말들

샤워하는 말들을 지나

조심스럽게 마방으로 들어가서

먼저 보이는 소망이에게 인사를 하고

루이가 어디 있나 살폈더니

소망이 옆에 옆에 루이가 있었다


루이는 2008년생의 수컷

소망이 보다 다섯 살이 어리다


철문을 밀어서 열고 루이의 목을 쓰다듬으면서 인사를 하고

고삐를 쥐고 마장 밖으로 함께 걸어 나왔다

말과 걸을 때는 옆이나 앞에서 걸어야지

뒤에서 걸으면 안 된다고 한다

아무리 순둥이 말이어도 뒷발은 무섭다고


언젠가는 꼭 달려보고 싶은 넓은 야외 승마장을 지나

실내승마장으로 들어가니

오늘의 코치님이 있었다


어제 어떤 분에게 배웠냐고 묻길래

성함을 못 물어봤어서

요래 요래 조래 조래 한 분이라고 했더니

아하! 젊은 남자분!이라고 대답하는 걸로 봐서

조금 더 나이가 있는 분인가 보다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루이에게 올라타자마자

코치님이 루이를 많이 쓰다듬어주라고 했다

천천히 걸으면서 루이의 목을 쓸었다

장갑을 끼고 있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매끄러운 털이다

루이야 안녕

무겁지 않니

잘부탁해


평보를 하다가 루이도 나도 몸이 풀린것 같으니

어제 배운 경속보를 해보자고 했다

어제 칭찬을 꽤 들어서

좀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새 코치님에게도 빨리 나와 루이의 경속보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루이 역시 내 혓소리에는 뛰지 않는다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고요한 승마장에

쯧쯧

쯧쯨쯧

쯨쯨쯨쯨

쯧쯨즜ㅈ쓰쯨즜즜ㅉ쓰


-

혼자 한번 해보세요

말이 알아들을 수 있도로 정확한 소리를 내야해요

그리고 발꿍-할때도 정확하게

혓소리와 발을 함께 정확하게


혓소리를 내다보면 나도 모르게

"가자!" 소리가 나온다

쯧즜즊쯧쯔쓰ㅉ쓰즜 루이야 가자!


그러면 코치님이 어느새 듣고 말한다


-

가자! 하면 말이 못알아듣죠

가자!는 아무 뜻도 아니에요

혓소리를 내세요


내 혓소리는 안들린다 그러더니

가자는 어떻게 들었지..


혓소리를 백번쯤 냈을때

어느순간 혓소리와 발이 딱 맞게 들어갔다는 느낌이 들면

정말 놀랍게도 루이가 속도를 올린다

아 '정확하게'라는게 무슨말인지 몰랐는데

이런 느낌이구나


속보를 하기 시작한 루이의 발걸음은 상당히 경쾌했다

소망이가 따탁따탁 하고 뛰었다면

루이는 투뚝투뚞 하고 뛰는 느낌


루이의 리듬에 따라 앉았다 일어섰다 앉았다 일어섰다

서너바퀴를 돌았을 무렵

루이와 함께 뛰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

루이랑 잘 맞으시네요

잘 맞는 말이 있어요

루이랑 호흡이 정말 잘 맞는 거에요

기억해두세요


코치님이 수업내내 몇번이나 루이와 내가 잘 맞는다 말해줬다

아. 잘맞는 말이 있는거구나.

그렇지. 사람도 그런걸

루이야 너도 들었니 우리42


경쾌한 루이의 등 위에 앉아

허리를 곧게 펴고 손을 내리고 어깨 긴장을 풀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는데

승마장 너머로 원장님이 보였다

파란재킷 위로 알록달록 스카프를 휘날리며

갈색 말 위에서 달리는 사람

허리를 곧게 편다는 것은 저런 것이구나

말의 리듬을 탄다는 것은 저런 것이구나

수업이 다 끝나고 나서 찍은 원장님의 승마

넋놓고 구경을 하고 있는데

코치님이 침착하게 끼어든다


-

멀리보지 마시고 앞을 보시구요

앉았다 일어섰다는 꽤 잘하시니까

이번에는 버티기를 해볼게요


버티기? 버티기는 뭘까?

말등을 감싼 허벅지에 힘을 더 꽉주고

발을 좀더 뒤로 빼고

그 자세로 속보 중인 말위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버틴다


말이 속도를 올리면 여지없이 주저앉고

멀이 방향을 틀면 여지없이 고꾸라진다

앞으로 고꾸라지면 루이의 목등을 만지는거라

루이가 놀랄까봐 사과도 해야한다

아이쿠 미안 아이쿠 미안 아이쿠


승마가 코어근육이 필요한 운동이라고 누군가에게 들었던 것이 생각나고

그것은 정말로 사실이었다

빠르게 걷는 말 위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버티려면

코어가 코어가!!

내 배에 없는 코어가 필요했다

코어없는 몸으로 몇바퀴를 버티려고 애쓰고 나니

정말로 힘이 들었다

바람이 부는데도 땀이 났다


어쩔 수 없다

비장의 카드다


-

코치님, 루이는 경주마였나요?


슬금슬금 스몰토크의 장을 열어보려는데


-

음. 이 승마장에 경주마는 없는데..

경주마가 딴게 아니라 선수가 타면 경주마에요


아...

루이가 경주마가 아닌 것은

내가 선수가 아니기 때문이구나..

스몰토크 종료..


그 뒤로도 루이는 계속 달렸고

앉았다 일어섰다를 하다가 자신감이 붙으면

버티기를 시도했고

다시 자신감을 바닥내고 앉았다 일어섰다고 돌아갔다

3초도 버티기가 힘들었다 훅훅


숨이 턱까지 찼을 무렵에 루이가 속도를 낮추길래

우리 정말 잘 맞네 하는 마음에 조금 감동스러워서 지긋이 바라봤더니

루이가 똥을 쌌다

말이 똥을 쌀때는 속도를 멈추고 서고

그럼 후두둑 똥이 떨어진다

그럼 코치님이 호다닥 빗질로 똥을 치운다

나는 흐뭇하게 말등에 앉아 바라본다


오늘도 50분이 순식간에 갔다

코치님이 루이 칭찬을 많이 해주라고 했다

천천히 걸으면서 루이 목을 많이 많이 많이 쓰다듬었다


등에서 내려 루이의 고삐를 쥐고 함께 마장으로 갔다

몸은 힘든데 마음은 아쉬웠다

루이의 방으로 데려다주고 옆을 보는데

한 여자분이 말의 목을 꼭 안고 있었다

와. 말을 안아도 되는 것이구나!


원장님은 승마장에

본인의 말을 가지고 있는 승마자들도 꽤 있다고 했다

본인의 말일까

자신의 말이 있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발길이 떨어질까


여자분이 가고 나도 루이를 한참 더 쓰다듬다가

작게 포옹하고 나왔다


승마장에는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아무도 소란스럽지 않았다

비를 맞으며 빈 승마장을 원장님이 늠름하게 걷는다


탈의실에서 장비를 벗고 나서는 나에게

원장님이 말했다


-

재밌었어요?

체력이 되면 다음주에는 연속 두시간도 한번 도전해보세요

그럼 부쩍 느니까


연속 두시간이라니!

연속 두시간을 탈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는데!


다음주에는 어떤 말을 만나게 될까

다음주에는 버티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승마는 정말 재밌다


꼬마들이 타는 조랑말과 꼬마들의 훈련 모습. 속도는 꼬마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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