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라 쓰고 최악이라 읽는다
미국 - 로스앤젤레스
LA라 쓰고 최악이라 읽는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LA 여행, 누군가에게는 최악인 곳.
뉴욕에서 시카고를 지나 LA로 가는 비행기에서부터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한국에서 남자 친구가 나를 보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루 먼저 공항에 도착한 탓에 호스텔에 갈 차비도, 숙박비도 부담스러워서 그대로 그냥 공항 노숙을 감행했다. 16시간 공항 노숙 후 남자 친구가 탄 대한항공 비행기가 방금 이륙했다는 소식을 보자마자 화장실로 가서 대충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했다. 그리곤 8개월 만에 우린 서로를 마주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어색하게 인사를 한 후 숙소로 함께 이동하면서도 데면데면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우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있었다. 장거리 연애를 하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로에게 소원해졌고 미국에서 만나기 직전까지도 연락 문제로 싸웠기 때문이다. 서로 만나서 대화로 풀자고 일단락되었기 때문에 만나서 대화를 나누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고질적인 연락 문제에 대해서 쉽사리 누구 하나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던 차에 저녁을 먹은 후 내가 먼저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남자 친구는 우리가 싸운 것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모르쇠로 일관했고 나는 그것에 화가 나 말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다음날 예약해 두었던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그리피스 천문대를 방문하는 개인 투어버스에 몸을 실었다. 남자 친구는 내가 왜 말도 안 하고 화가 나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아 했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화가 나서 웃지도, 말하지도 않았고 투어에 끌려다니는 내내 불편했다. 재밌어서 두 번씩 방문한다는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나에게는 한없이 지루하기만 했다. 화려한 볼거리가 많았던 워터 월드에서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긴장감속에서 물세례를 맞으면서도 즐거워하는 관중 분위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모두가 웃으며 환호성을 지르고 손뼉을 치는 중에도 두 명만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저 앉아있을 뿐이었다. 해리포터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 촬영했던 모습들을 보거나 워킹데드 드라마를 재현해 놓은 곳까지, 동심으로 굳이 돌아가지 않아도 남녀노소 너무나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곳을 잊을 수 없는 즐거운 곳이라고 표현하고 누군가는 지루하고 견디기 힘든, 불편했던 곳이라고 말할 것이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일정이 끝난 후 영화 '라라 랜드'에서 남녀 주인공이 멋진 춤을 추는 장면의 배경이었던 그리피스 천문대에 도착했다. 우리는 각자 떨어져서 천문대 내부를 구경했고, 해 질 녘쯤에는 밖으로 나와 홀로 야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온종일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온종일 말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동안 서로 연락을 잘 못하고 싸웠던 것에 대한 속상함이었고, 대화로 잘 풀어서 다시 좋은 관계로 돌아가고 싶은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싫어서 이렇게 온종일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화가 났으니 나를 봐달라고 속으로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떨어져 있는 동안 왜 보고 싶다는 말을 안 하냐는 나의 질문에, 보고 싶지만 보고 싶다고 말해봤자 볼 수 없어서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는 그의 대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얼굴을 보고 만나게 되면 그제야 내게 보고 싶었다고 말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오래된 상자를 열어보니 내용물이 다 상해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아름다운 석양을 보며 해가 저물어감과 동시에 그가 한 말은 어느 정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심장을 덜컹 가라앉게 했다.
"우리, 그만 만나자"
영화 '라라 랜드'의 아름다웠던 촬영지로 둘 다 꼭 가 보고 싶어 했던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영화처럼 길었던 3년 연애의 끝을 보고야 말았다. 화가 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느끼고 있었다. 헤어짐이라는 거대한 먹구름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그리곤 결국, 폭우를 동반하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3년 동안 쌓아왔던 신뢰와 믿음이 헝클어져 버려서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진 기분이었다. 믿어지지 않는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황홀했을 여행지. 그러나 로스앤젤레스는 나에겐 최악의 여행지가 되어버렸다. 내가 죽으면 따라서 죽겠다던 남자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헤어짐을 고함과 동시에 180도 차갑게 변해버린 그 남자가 낯설었다. 설마, 그냥 홧김에 한 말이겠지 싶어 그다음 날까지도 같이 있었다. 하지만 비행기 일정을 변경하면서까지 한국으로 바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1년만 여행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은 지킬 필요가 없어졌고 이젠 보고 싶다고 왜 말을 안 하냐는 문제로 싸울 필요도 없어졌다. 우리의 관계가 철옹성처럼 단단하다고 생각했다. 여행하면서 단 한 번도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준 적이 없고, 좋은 곳을 가고 좋은 것을 먹을 때면 다음에 함께 와야지 생각하면서 국가를 이동할 때마다 한국으로 엽서를 보내던 나였다. 그리고 이 여행의 끝에는 남자 친구가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큰 깨달음을 하나 얻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깨지지 않는 믿음이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하고, 감정을 숨기고 연기를 하는 배우이며, 그 때문에 우리는 그 누구도 100% 믿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고 당연한 것은 없으며 불안함을 감추려 아무리 애써봐도 한번 금이 간 항아리는 고쳐서 쓸 수가 없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부디 화내지 말고, 슬퍼하지 말고, 아파하지 말고, 행복하게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