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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논스 Jun 30. 2020

같이 삽질하실래요?

깊숙하고 더 깊숙히, 역삼에서

"버튼을 누르면 모든 것이 작동하는 곳이지"


코워킹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다. 멋있게 들리긴 하지만 이는 동시에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는 곳일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면 애초에 그 버튼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눌러야 하는가?


That button.jpg


"What you want"


많은 논숙자들은 그 버튼을 자신이 지금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에 대한 버튼으로써 정의한다. 해리포터의 하울러마냥 누르는 순간 "나는 무엇을 원한다!"를 커뮤니티에 메아리치는 그런 버튼. 꾹 누르면 어떤 알 수 없는 알고리즘으로 인해 커뮤니티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버튼.


“말이야 쉽지..”


매 순간 격동하는 차디도 찬 이 현대사회에서,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날카롭게 정의 내리는 것만큼 난해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애초에 그 무엇을 원하는 나는 누구이며, 나는 그것을 진정 진심으로 원하는가?


태초에 인류가 이 지구에 등장한 이래로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항상 제기했던 질문과 같은데 이런 심오하고 난해한 질문을 갓 입주한 사람, 혹은 방금 처음 만난 사람한테 툭툭 던지니 나름 오픈마인드라 자만했던 필자마저도 처음 논스에 들어왔을 때 굉장히 혼란스러웠고 다른 입주자들은 더더욱 그랬을 것이며 지금도 그럴 것이다. 공간이랑 사람 좋다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거나 고찰할 여유도 없이 무언가가 뜬금없이 마음 깊은 곳으로 훅 파고 들어오는 느낌..


"어지럽다"


"잘 모르겠다"


"무엇이 무엇인가"


마치 아마존 정글처럼, 혼란스럽고 아무것도 정돈되어있지 않는 느낌을 받는다. 어떻게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실제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누구한테 먼저 인사를 해야 할지, 밥은 혼자서 먹을지 같이 먹을지 참 애매하고 매 순간이 딜레마다. 선택지가 쓸데없이 많을 때처럼 말이다.


그냥 누가 와서 나는 무엇을 원한다고, 나는 누구라고, 나는 이렇게 하면 된다고 말해주면 좋을 텐데, 여기서는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판단이 일어났다 한들, 모두 마지막엔 "사실 나도 내가 누군지 잘 모르고 그 답은 우리 안에 있지 않을까.."고 끝맺음을 한다. 답을 아는 것 마냥 멋있게 질문해 놓고 결국 자기도 모른다고 하니 얄밉다.


1층 미니 도서관에서.jpg


항상 강조하지만, 그리고 위 글에서부터 바로 알아차렸겠지만 논스는 기괴하고, 특이하고, 흥미로운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한다. 이 세상이 다양하고 혼란스러운 만큼 논스 또한 다양하고 혼란스럽다. 하지만 얼마 지내다 보면 혼란스러운 다양함은 잠깐,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공통의 원천, 베일 속에 가려진 숨겨진 조화가 느껴진다.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고 프레임을 내려놓으니 "쟤는 나와 너무나 달라", "저 사람은 이해할 수 없어" 라고 정의를 내렸던 이 사람, 저 사람 안에서 나의 목소리를 발견하기 시작한다. 내 안에 있는 목소리들과 내 안의 색채들을 그들 안에서 발견한다.


그렇게 이리 튀고 저리 튀는 수많은 사람들과 지내다 보면 어느 순간 무작위 속에서 어떤 질서를 발견하게 된다. 사방에 곤충과 맹수들이 도사리고 있고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는 빽빽한 밀림 속에서 헤매고 있다가 갑자기 제자리에서 마주하는 고요함이랄까..


그 고요함 속에서 버튼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찾으려고 발버둥 치거나 떼를 쓰면 잘 보이지 않는 버튼. 하지만 버튼은 항상 있어왔다.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 여기서 '우리'는 논숙자는 물론 운영진 모두를 포함한다.


이런 배경에서 새로 입주한 논숙자나 기존 논숙자들에게 “버튼, 알아서 찾으세요”라고 말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아니, 스스로도 그 버튼의 존재와 위치를 망각할 때가 많기에 무책임이라기 보단 무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무지는 죄인가?"


거의 대부분 종교에서는 무지는 죄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그리고 알고 싶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는 것, 죄라 한다. 그리고 이 죄는 어떤 의식을 통해 씻는다기 보다는 이 죄가 죄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즉 스스로가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무지'라는 죄가 꽃과 열매로 전환되는 신호탄이라고 한다.


"I know that I know nothing"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안다)

- 소크라테스


무지함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인식했을 때 비로소 무지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역설적이다. 하지만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왜냐면 우리 운영진마저도 논스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정확히 설명하기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버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버튼을 눌렀는지 안 눌렀는지 조차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나 무지하다. 아는 게 없다. 아니, 알 수가 없다.


누군가가 앞에 나서서 논스는 다 내 덕분이야, 나의 책임 덕분이야, 나의 허슬링 덕분이야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본인조차도 질문에 꼬리에 꼬리를 물면 결국 사실 논스가 100이라면 자신은 1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무지하다.


“사실, 잘 모르겠다”


운영진마저 잘 모르고 있는데, 새로 온 입주자에게 무언가가 있으니 잘 찾아보라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거짓말이 되겠다. 그래서 논파(운영진)는 우리라도 먼저 해보고 알려주자는 작정으로 작년부터 라이프마이닝(Life-mining)을 시작했다. 코인을 위해 수학공식을 푸는 전산작업이 아닌, 인생을 얻기 위해, 삶으로 떠오르기 위해, 매 순간에 온전히 존재할 수 있기 위해 푸는 '인생채굴작업.'


작년 가을, 부동산세와 관리비 출혈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커뮤니티를 지속하느냐 마느냐, 다른 사업으로 피벗 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불명확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논파에게 가장 필요했던 삽질작전, '라이프마이닝.'


Digging for the "thing"


누구는 매일 유튜브로 자신의 이야기를 녹음하기 시작하고, 누구는 매일 개인, 사업일기를 쓰기 시작하며, 누구는 매일 연습실에서 춤을 추고, 누구는 블로그와 녹음기에다가 순간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진행형이다.


끝이 날 것 같지 않다.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영원한 진행형의 여정,


그 과정에서 어느 순간 큰 파동을 겪은 논스


그렇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들어온다.


왜 들어오는지 모른다. 


그냥 들어온다.


마케팅 비용을 냅다 들이부은 적도 없다.


그럴 돈도 없다.


그런데 무언가에 이끌려 커뮤니티가 생동하기 시작한다.


매 순간 바뀌고, 매 순간 재정립된다.


뱀이 허물을 벗듯, 고통의 탈피과정을 통해 더 매끈해지고, 더 커지고, 더 성숙해진다.


그렇게 지금 역삼 언덕, 푸른 하늘 한아름 안으며 서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된다는 식의 단호박 해결책을 주기 위한 글이 결코 아니다. 이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것은 변화 그 자체밖에 없다고 한다. 모든 수수께끼를 다 풀 것 같았던 한 순간의 해결책은 그 다음 순간의 딜레마가 된다. 그러기에 매 순간이 새롭고, 매일이 새롭고, 매 관계가 새롭다. 


그래서 같이 해보자는 것이다. 라이프마이닝으로 성장한 커뮤니티인만큼, 한 지붕 아래 모두 다같이 해보자는 것이다. 당신을 논스로 이끈 무언가의 힘, 라이프마이닝의 힘. 끊임없이 폭풍치는 이 삶 속에서, 고요하고 평온하게 매 순간에 온전히 임할 수 있는 희망을 같이 찾아보자는 것이다.


바로 여기, 논스에서



작성 김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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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전(Challenge): 뭉치면서 함께 도전하는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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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情): 나를 줄여 너를 얻는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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