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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부와약초꾼 Oct 25. 2022

가업을 잇는 농부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산과 들의 약초도 달라집니다. 옆지기는 늘 약초를 캐러 다니시는 베테랑 약초꾼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라서인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따라 약초를 캐러 다녔다고 합니다. 가업을 이어 일을 하니 30여 년 넘게 약초꾼으로 살아오신 어른들의 경험치를 그대로 이어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계절에 따라 마을 곳곳에서 무엇이 나는지를 알고 있고, 이러한 지식과 지혜를 나누어 주시는 살아계신 약초 마을 지도와 다름없습니다.


 

 아버님은 대구시의 어느 한의사의 제안으로 약초 일을 시작하셨고 수확하여 손질해 놓은 약초가 상당히 깔끔하여 ‘저 집 물건 좋다.’라는 평을 늘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작약과 같은 뿌리 작물은 심은 뒤 4년 정도 지나 수확하므로 미리 수요를 파악하여 수만 평을 심어 놓더라도 수확기에 그만큼 판매가 될지는 보장할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또 4년 뒤에 수확을 해야만 돈을 벌 수 있으므로 그동안 작물을 관리하는 데 투입되는 노동력 등의 생산비를 충당하기 위해 빚을 질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4년이 지나 수확한 작약은 저가 수입 작약에 밀려 값이 폭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부모님은 지난 4년 동안의 생산비를 충당할 수가 없어 큰 빚을 떠안게 되셨지요. 뼈아픈 실패담을 통해 저희는 약초 농사를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약초 산업의 이러한 뿌리 깊은 문제를 풀어 나가고 싶었습니다. 


 

 이와 같이 다짐하며 작은 약초 브랜드인 ‘농부와 약초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무농약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해 오신 아버님의 질 좋은 약초를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아버님은 ‘자소엽’이라는 보라색 깻잎처럼 생긴 약재를 전국 최초로 친환경 무농약으로 생산했습니다. 막상 농사를 지어 보니 무농약 재배가 쉽지는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2002년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무농약 인증을 받은 자소엽 재배에 성공했습니다.



 이와 같이 2000년대 초반에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던 친환경 약초 재배를 시작했습니다. 보통 약초를 대량 재배하려면 제초제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아버님도 대량 주문량에 맞추어 생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제초제를 쓰셨습니다. 그런데 중국산과 다른 상품을 내놓으려면 재배 방식의 수준도 달라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그래서 친환경 재배에 도전했던 것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한의원에서 많이 쓰는 작약, 황기, 천궁을 재배했지만 모든 약초를 무농약과 친환경으로 키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소엽, 독활(두릅의 일종), 우슬(비름과 식물) 등 무농약과 친환경 재배가 가능한 약초만을 골라서 길렀습니다. 아버님이 바라는 것은 건강한 약초를 소비자들에게 공급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땅에서 약초를 재배하기 위해 산을 개간해 밭을 만들었습니다. 흙은 모두 중금속 등의 토양 검사를 마쳤습니다. 인근의 밭에서 제초제를 쳐 우리 약초밭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점점 산속의 밭이 늘었습니다. 재배지를 동네 근처로 옮겨 한 곳을 정해 대량으로 재배하면 좀 더 효율적이겠지만 부모님은 안전한 흙이 중요했기 때문에 가급적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을 선택했습니다.



 아버님은 이러한 약초 일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만큼 힘들고 험하기 때문에 당연히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님이 이 일을 지속하는 것은 좋은 약초를 재배한다는 자부심 때문입니다. 막상 아들이 함께하겠다고 했을 때 당신이 해 왔던 일을 아들이 알아주는 것에 내심 뿌듯한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많았다고 합니다.


 옆지기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등을 보며 자랐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산에 가시니 좋으나 싫으나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일단 아침에 눈 뜨면 산과 들로 나가는 것이 일이었다고 합니다. 주말이나 방학도 없었지요. 솔직히 어릴 적에는 나가 놀고 싶었을 텐데 부모님이 하는 일이 힘든 작업인 것을 잘 아는 까닭에 돕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산에서 하는 일이 몸에 배였다고 합니다. 결혼 전까지는 부모님 일을 돕는 정도로 참여했지만 결혼한 뒤에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농부와 약초꾼’의 길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나이가 드실수록 육체노동으로 인한 고단한 일상에 상당히 마음이 쓰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희도 그와 같은 길을 걷겠다고 나선 것은 그 모습을 존경하고, 땀 흘려 일하시는 모습이 더 커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농부와 약초꾼의 기둥과도 같습니다. ‘어디에 내놓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정직하고 좋은 약초’를 내놓기 위해 오늘도 함께 한 걸음 내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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