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군가의K Sep 20. 2020

언제나 서로에게 따뜻함이길

서로라 부를 수 있는 당신들이 있어 다행이야

나는 주기적으로 산을 타 줘야 하는 사람이다. 무릎에 힘을 주어 경사진 산행로를 올라갈 때 평온함을 느낀다. 근육이 신음하고 가파른 숨에 시달릴 텐데 어떻게 평온하냐고? 그냥 그런 게 있다. 조금 변태 같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내가 이 모양인 사람인 것을 달리 어찌하겠는가.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도 잘해요'를 마음속에 품고 살았던 나는 뭐든 혼자서 잘한다. 외로움도 별로 타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어쩐지 등산은 하면 할수록 '혼자서도 잘하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이냐'고 내게 묻는다. 그러게요, 대체 그게 무슨 소용일까요?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처럼 무인도에 조난당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산신령님께 대화를 시도해보지만 돌아오는 건 고요함뿐이다. 조금은 자조적인 그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던지던 와중에 어떤 사람들을 만났다. 몹시 용기를 내어.


그 사람들과 이 산도 다니고 저 산도 다니면서 즐거웠던 것 같다. 상쾌한 숲 속의 공기를 함께 마시는 행복을 깨달았달까. 겨울 산의 차가운 공기에 입김을 뿌리며 컵라면을 나눠먹기도 해 보고, 모둠전 한 접시에 막걸리 병으로 볼링핀 스트라이크도 만들어보고, 처음 가보는 산에서 길을 잃어 이리저리 헤매기도 해 보고,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도 춰보고… 뭐 돌이켜보고 싶지 않은 우여곡절도 있긴 했지만 어쨌든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 게 참 좋은 것 같다. 시시콜콜함을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 출근길 버스에서 졸다가 내릴 곳에서 못 내리는 바람에 지각하게 생겼다든지, 퇴근길에 먹고 싶은 컵라면을 사려고 편의점을 세 군데나 돌았다든지, 집 근처를 배회하는 고양이 선생님들께 매일 같이 간식 조공을 바치고 있다든지, COVID-19의 여파로 요가를 못 가서 근손실이 왔다든지 뭐 그런 것들. 나는 그다지 사람 사는 얘기 궁금해하는 타입이 아닌데 참 이상하다.


돌이켜보니 이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 내 삶이 많이 바뀐 것 같다. 그들의 영향력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주로 확장의 형태로 작용한다. x축과 y축, 2개의 축 안에서도 1사분면이나 2사분면에서만 깨작거리며 살던 내게 z축을 마저 그리면 반원이 아니라 원뿔도 만들 수 있다며 입체도형을 알려준 수학선생님 같았달까. 솔직히 서로 무언가를 해주거나 받았다기보다는 나 혼자서 많은 걸 생각하며 삶이 확장됨을 느꼈던 것 같다. 이런 게 바로 관계라는 것의 신기함일까. 그들도 많은 걸 느끼며 이런 관계의 힘을 새삼스러워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는 매일 같이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도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물론 대략의 취향이나 생활의 패턴, 고양이나 강아지를 몇 마리나 키우는지, 요즘의 골칫거리나 소소한 즐거움은 무엇인지 같은 건 어느 정도 꿰고 있지만.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삶을 살고 싶고 어떤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지 사실 잘 모른다. 일상을 함께 하며 사귀어 온 친구들과는 확실히 뭔가 다르다. 그래도 생각하건대 우리는 왠지 벗겨내면 벗겨질 껍질 같은 관계는 아닌 것 같다. 그럼 대체 무얼까? 희망사항으로는 쌀알과 쌀눈 같은 관계였으면 좋겠다.


관악산 산행 후 함께 걸었던 길 위에서 만난 문장




물의 화학식은 H2O이다. 수소가 두 개, 산소가 한 개. 세 개의 원자가 서로 인력과 반발력을 작용하며 공유결합을 하여 물이라는 분자가 된다. 물은 이렇고 저런 화학적 특성에 의해 온도가 올라감에 따라 부피가 팽창하는 여느 분자들과는 달리, 온도가 내려가도 부피가 팽창하는 특이점을 지니고 있다. 한여름에 꽝꽝 얼려 잔뜩 뚱뚱해진 생수병처럼 우리는 어쩌면 그런 특이점으로 이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각자의 H이고 각자의 O일 뿐이다. 그러다가도 H2O가 되고는 하는 것이다. 그들에 관한 글을 쓰다 우리가 물 분자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며 삶의 궤적을 함께 해나갈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조금은 섣부른 생각일까?


오늘은 나의 생일이니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말들을 마구 써본다. 누구 말마따나 '나사 좀 풀어봐도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당신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날이 올지를 의심하며 생각한다. 언제나 서로에게 따뜻함이길. 이 문장 잊지 말고 앞으로도 잘 지내봅시다, 우리.



2020년 9월 서른 살이 된 청명한 가을날

당신들을 떠올리며 K가 쓰다


매거진의 이전글 울고 싶은데 눈물이 안 나올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