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적인 동네 러너의 다짐
우리 아빠는 거의 매일 하천에서 걷기 운동을 한다. 아무리 햇빛이 쨍쨍해도, 비바람이 몰아쳐도 항상 같은 시간에 나간다. 후덥지근한 여름에는 혹시라도 일사병에 걸릴까 봐 해가 없는 시간대로 바꾸라고 제안도 해봤지만 “다 내 루틴이 있어.”라면서 확고하게 거절한 적도 있다. 뭐지, 이 단호한 태도를 보니 왠지 어릴 적 읽은 '좀머 씨 이야기'에 나오는 좀머 씨가 떠오른다(결말은 무시하기로 하자).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말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걷다 보니까 보는 사람만 본다.”
그래서 내가 한 말. “그래? 아는 척 좀 하지 그랬어.”
음, 그렇게 말한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 아는 척을 할 수 있는 사람이던가.
동네를 매주 뛰어다닌 지도 1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다. 이쯤 되면 아빠가 했던 말처럼 나도 길에서 만난 사람을 한두 명 정도는 알아볼 법도 하다. 그렇지만 내가 달리는 요일과 시간대가 매번 달라져서일까.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을 기억하고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다. 보통은 내가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릴 때가 많고, 스쳐 지나간다고 해도 다음번에 만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길에서 예기치 않게 마주치는 친절한 응원이나 잠깐의 대화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꾸준히 달리다 보니 소소한 에피소드는 몇 가지 생겼다.
예를 들면 걷기 운동을 하던 아저씨께서 무릎보호대를 하고 뜀박질하던 나를 부르더니 무릎보호대의 효능에 대해 물어보신다던가. 몇 개월이 지나서 무릎보호대를 착용하고 있지 않은 나를 알아보시더니 무릎보호대의 효능에 대해서 또다시 물어본다던가(어떻게 기억하고 계셨을까. 신기하다.)
맞은편에서 씽씽 달리는 자전거 동호회원 대여섯 명이서 끊임없는 파이팅을 외치면서 다가오는데 왠지 유일하게 달리고 있는 나를 보는 것 같길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팔을 흔들었던 기억이라던가(정말 나한테 했던 응원이 맞을까. 아직도 궁금하다).
주말 아침부터 힘겹게 달리고 있는 나에게 맞은편에서 달려오시던 아주머니께서 해사한 얼굴로 엄지를 척 들며 파이팅을 외친다던가. 몇 주 뒤에 또 만나서 서로 웃음 섞인 파이팅을 외치며 만났다 헤어지는 그런 순간들.
그런 순간들은 참 별거 아닌데 발걸음이 가벼워지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가끔 만나는 친절한 응원과 작은 에피소드가 모여서 달리기를 더 좋아하는 경험이 된다. 나도 지나가는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다는 바람도 생긴다. 같은 장소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운동하고 있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인연이어도 동네를 달리다가 마주치면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게 신기하다. 주기적으로 마주치는 특정한 인연은 없지만 일단 길에서 달리는 사람을 마주치면 흐뭇한 마음이 든다. 일종의 동지애인가. 속으로만 파이팅을 외쳐봐야 상대방이 어떻게 알겠냐마는 어쨌든 나는 조용히 응원을 보낸다.
사실 아직까지 익숙지는 않다. 길에서 누군가 파이팅을 외치면 나에게 하는 응원이라는 생각을 못해서 소심한 파이팅조차 못하고 지나칠 때가 많다. 생각해 보면 굳이 네 응원 내 응원 나눌 필요 뭐가 있나, 운동하는 사람 모두 파이팅인 것을. 아직 내가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다른 사람에게 마음 놓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는 데 서툰가 보다.
엄청난 내향인이라 아직까지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배짱은 없지만, 어쩌면 계속 달리다가 무심한 척 파이팅을 외치면서 지나가는 날이 올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못 본 척 스쳐 지나가기보다 응원이 담긴 미소를 보내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새 포근해진 날씨를 맞아서 일단 웃으면서 달리기를 목표로 삼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