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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철 Nov 18. 2023

소소한 날의 파리 산책

몽파르나스는 언덕 지대가 아니었다. 피카소, 헤밍웨이 등 수많은 예술인들을 품었다는 옛날의 그 ‘파르나스(Parnasse) 언덕(Mont)’은 대로를 만들면서 깎여 평평해지고, 그 자리엔 200m 높이의 몽파르나스 타워가 들어서 있다. 타워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는 명성에 비해선 오밀조밀한 느낌이다. 에펠탑만 도드라질 뿐 여타 도시들의 우후죽순 같은 고층빌딩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때문에 사방으로 시야가 확 트이고 안정감을 준다.

200년 전에 조성된 몽파르나스 공원묘지에는 40만 명의 망자가 묻혀 있다고 한다. 도심 한가운데 비싼 땅에 이렇게 넓은 면적으로 조상들 묘를 조성해서 수시로 들락거리는 파리 시민들이다. 사람들이 찾기 쉬운 1 구역 한가운데에 사르트르와 그의 연인 보봐르의 묘비가 있다. 누군가 놓고 간 꽃송이들은 시간과 함께 시들어 있고, 누군가는 묘비에 입맞춤을 했는지 입술 모양의 루즈 자국들이 선명하다. 두 연인 간의 사랑과 그들을 흠모하는 후세 사람들의 사랑을 실감 나게 해주는 장면들이다.


둘째 날 일찍 민박집을 나서서 도착한 센 강 남단의 오르세 미술관은 미술에 문외한임을 자책하지 않아도 되게끔 해준 3시간이었다. 대중에 많이 알려져 있는 밀레의 작품 등 누구에게나 익숙한 작품들이 많았다. 고흐가 그린 아를 밤하늘의 별들은 '그렸다'기 보다는 '물감을 듬뿍듬뿍 붙여놨다'는 표현이 맞을 듯싶었다. 손만 대어도 별빛 물감들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부피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무심코 들어간 작은 방에선 정면에 나타난 느닷없는 작품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였다.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 사진인가 싶을 정도로 여성의 나신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전 지식이 없었기에 쑥스럽고 민망하여 잠시 훔쳐보다 슬그머니 나와야 했다. 알렉상드로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은 눈에 익은 탓인지 선정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다. 책에서 사진으로만 봐오던 작품의 실물이라는 현장감이 묘한 미적 감동을 안겨 줬다. 그 외에도 ‘지옥에서 만난 단테와 버질’, ‘사하라 사막에서의 저녁 기도’, ‘카인’, ‘코린트의 마지막 날’ 등 대형 화폭에 실린 낯선 작품들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센 강 맞은편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은 오후 반나절로는 어림도 없었다. 내내 이리저리 허둥대다 나온 느낌이었다. 작품 수가 총 3만 8000점이라니 한 작품에 1분씩만 잡더라도 하루 8시간씩 총 79일이 걸린다는 계산이다. 4명의 노예들 조각상이 맨 먼저 눈길을 끌며 카이사르와 한니발, 밀로의 ‘팔 없는 비너스’ 등 사진으로만 봐 왔던 조각들이 실물로 생생하게 눈앞에 서 있다. '니케(Nike)'라 불리는 사모트라케 승리의 여신상, 2000년 전에 만들어져 오랜 세월이 흘러 목과 팔이 떨어져 나간 작품인데도 저렇게 역동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높고 넓은 공간에서 만난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과 ‘사비니 여인 중재’, 두 작품이 주는 현장감은 대단했다.

특히 로마 초기, 친정아버지 타티우스와 남편 로물루스 사이에 서서 결연하게 싸움을 말리는 사비니 여인 헤르실리아의 모습이 극적 감동을 준다. 갓난아기를 들어 올리며 친정 쪽 군사들에게 호소하거나 친정과 남편 양쪽의 군대 사이로 어린 아가들을 내몰며 싸움을 말리는 여러 사비니 여인들 모습이 가로 5m가 넘는 대형 그림에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 외에도 ‘십자가를 진 예수’, ‘가나의 결혼식’,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등의 대형 작품들 속에 나타난 웅장함과 생생함에 압도되다 보니 정작 최고 명화인 ‘모나리자’ 앞에서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앞에 모인 수많은 인파에 놀랄 뿐 정작 리자 부인의 은근한 미소엔 별 느낌이 들지 않았다.

샤를 드골 에뜨왈 광장의 개선문에는 양편 기둥 앞뒤 4개 면의 웅장하고 섬세한 조각들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샹젤리제 거리 쪽 왼편 기둥의 ‘라 마르세예즈’를 바라보고 있자니 1792년 당시의 수백여 의용병들의 출정의 함성이 생생하게 귓가에 들려오는 듯싶었다. 

2㎞ 정도의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콩코르드 광장에 이르면 18세기말 공포정치의 대명사, 그 무시무시한 단두대가 있었던 자리에 네 줄기 물을 뿜는 시원한 분수대가 자리 잡고 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수많은 이들이 공포에 질려 서 있었을 그 주변에는 불 위에 지글거리는 양고기 꼬치와 소시지의 구수한 연기가 역사의 불행과 무관하게 사람들 입맛을 돋우고 있었다.



100여 년 전 파리의 유흥문화를 선도했다는 찬란했던 물랑루즈, 영화나 사진으로 봤던 위용보다 실제로는 초라해 보이는 빨간 풍차를 지나 몽마르트 언덕에 올랐다. 마네, 모네, 샤갈 등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예술가 촌을 형성했다는 과거의 흔적들을 확인하기엔 언덕 위는 너무 혼잡했다. 그러나 샤크레쾨르 성당을 등지고 남쪽으로 길게 이어진 계단에 앉아 몽파르나스 타워와 에펠탑이 도드라진 시내 전경을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몽마르트 언덕의 운치는 충분했다.

길게 줄 서서 들어갔으나 별 감흥은 느끼고 못하고 그냥 나온 노트르담 성당을 뒤로하고 한참을 걸어 뤽상부르 공원에 들었다. 릴케 등 수많은 문학인들이 즐겨 찾아 묵상했다는 곳. 그들을 흉내 내는 이들 옆 빈 의자에 앉아 같이 명상에 잠겨봤다. 이 공원에서 시인 폴 베를렌느가 지었다는 시 ‘하늘은 지붕 위로’를 검색해 읽으며 조용히 읊조려 보았다.

하늘은 지붕 위로

저렇듯 푸르고 조용한데

지붕 위에 잎사귀를

일렁이는 종려나무

하늘 가운데 보이는 종

부드럽게 우는데

나무 위에 슬피 우짖는 새 한 마리

아하 삶은 저기 저렇게

단순하고 조용하게 있는 것을

시가지에서 들려오는

저 평화로운 웅성거림

뭘 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울고만 있는 너는

네 젊음을 가지고 뭘 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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