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술을 좋아한다. 퇴근 후 집에서 둘이 저녁을 먹으며 기울이는 술잔은, 고단했던 하루를 진정시키는 치료제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단골 주종은 맥주. 단돈 만원에 맥주 네 캔을 고를 수 있는 편의점을 애용한다. 집 앞 편의점은 각종 술과 저렴한 안주가 차곡차곡 쌓여있는 곳간이다.
가끔은 포도주를 마신다. 이유 없이 술이 고프던 날에, 아주 비싸진 않지만 그렇다고 싸구려도 아닌 포도주 한 병을 사다가 소고기 채끝살에 곁들여 비웠었다. 나는 와인보다 포도주의 어감이 좋다. '포도주'라는 말은, 잘 익은 과실주가 통 안에서 붉게 넘실거리는 먹음직한 이미지를 내 머릿속에 재생시킨다. 어쨌든 그날 우리는, 가끔 이렇게 비싼 술을 마시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나에게 술은 소주다. 고깃집이나 횟집에서 테이블에 널찍하게 한 접시 펼쳐놓고 마시는 소주 한 잔이 최고다. 오가는 소주잔 속에 술술 풀리는 대화도 좋다. 갓 취업한 새내기 시절, 역시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와 늦은 밤까지 소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말 그대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술과 이야기에 한껏 취한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아내는 술을 취하지 않을 만큼만 마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술의 본질적 기능을 배제하는 아이러니한 생각이지만 이해한다. 몸도 못 가눌 만큼 술을 마시는 건 누가 봐도 꼴불견이니까. 결혼하고 몇 번 술을 마시고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내가 걸쭉하게 취해서 들어온 건 항상 소주를 마셨을 때였다. 그래선지 아내는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소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취했어?"
언젠가 모임에서 술을 마시고 왔을 때 아내가 따갑게 말했다. 분명 취하긴 했지만 티 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집에 들어오기 전, 문밖에서 스트레칭을 해보았는데 자세나 컨디션이 썩 훌륭했다. 물론 집 앞에서 스트레칭을 한다는 것 자체가 주량을 초과했다는 증거겠지만, 그땐 그런 생각이 안 들었다. 그저 '오늘은 적당히 마셨네?' 정도의 반응을 기대했는데, 신발을 벗기도 전에 알아볼 정도로 취했다는 게 놀라웠다. 모호한 표정과 대답으로 대충 얼버무린 다음 곧장 샤워를 했다.
그렇다고 그대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샤워 후 예의를 갖춰 정갈하게 운동복을 차려입고 아내가 있는 소파 옆 자리로 가서 앉았다. 오늘 술자리에서 오갔던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최대한 또렷한 목소리로 전했다. 내가 그렇게 대책 없이 취한 게 아니라는 걸 적극적으로 어필하기 위한 조치였다. 잘만 하면 내일 아침에 치를 2차 잔소리 구간을 하이패스로 통과하게 될 거였다.
"혀가 꼬인 것 같은데?"
이쯤 되면 남은 방법은 하나, 바로 능글맞은 웃음과 애교 섞인 농담……은 아니고 그냥 냉수 한 잔 들이켜고 잠이나 자는 게 맞다. 다음 날 숙취에 시달리는 날 보며 아내는 잔소리 대신 뾰로통한 걱정을 꿀물 한 잔에 담아왔다. 오후가 돼서야 겨우 기운을 차린 내가 멋쩍게 다가가도 묵묵부답이었다. 많이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며칠이 지나 둘이서 간단히 차려놓은 안주에 맥주를 마시다가 문득, 내가 말했다.
"우리 둘이 딱 요 정도만 마시는 게 좋은 것 같아."
"근데 그때는 왜 그렇게 마셨어?"
"반가운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
아무리 반가워도 그렇지, 술 좀 자제하면서 마시라는 말을 기다리고 있던 내게 아내가 말했다.
"나도 이렇게 마실 때가 부담 없고 좋아."
"응."
앞으로도 즐거운 모임이야 계속 있을 테고, 이래저래 술 마실 일도 간간이 있겠지만, 아내와 둘이 마주 앉아 마시는 술의 각별함에 비할 바는 아닌 듯싶다. 출퇴근길에 아내가 무심하게 내뱉는 "오늘 저녁 한 잔?"에 내 마음이 꽉 차게 흐뭇한 건, 다른 술 약속에선 느낄 수 없던 새로운 종류의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