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이라지만, 스무 살의 나와 지금의 나에게 흘러가는 시간의 밀도는 같지 않다. 엄살 좀 보태서, 이제 나는 흐르는 시간이 마냥 아름다워 보이지만은 않는 나이를 산다. 앞으로는 어떨까.
아내를 처음 만난 건 스무 살 때였다.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 만난 아내는 두 학번 선배였고, 똑 부러지는 첫인상에 조금은 통통한 볼살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아내는 나와 마찬가지로 많이 어렸지만, 당시의 나는 아내를 꽤나 우러러보았다. 아내뿐만 아니라 모든 선배들을 다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험난한 대학생활을 먼저 이겨내고, 긴장한 기색 하나 없이 후배를 리드하는 면면들이 참 어른스러워 보였다. 아내는 친절한 선배였고, 나는 예의 바른 후배였다. 2년 동안 캠퍼스에서 아내를 만날 때마다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아내를 다시 만난 건 스물여덟의 여름이었다. 가을에 열릴 관현악 합주대회에 함께 팀을 꾸려 참가하자는 친한 선배의 연락을 받고 완곡히 거절했지만, 재차 요구하는 선배에게 미안해 강남의 한 술집에서 모임을 갖기로 했다. 그리고 그 모임에서 아내를 다시 만났다. 알고 있던 사람인데도 처음 본 것처럼, 새삼 첫눈에 호감이 갔다. 합주대회야 뭐 어차피 프로도 아니고 대강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보다 이 모임에서 아내를 계속 만나고 싶었다.
그날 모임이 끝나고 돌아가기 전에 인사를 나누는데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가는 방향이 같으면 동행하자고 말하려 했는데. 서둘러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 플랫폼으로 갔더니 운 좋게도 아내가 보였다. 어디까지 가시냐고 너스레를 떨며 함께 지하철에 오른 뒤로 약 십오 분 간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도저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어이없는 웃음만 나왔다. 그렇게 실없이 비죽비죽 웃으면서 '그럼 그렇지, 내가 무슨' 따위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후 2년 동안 직장인 동호회 형식으로 합주도 하고 몇몇 대회에도 참가하며 함께 연주활동을 하다가 뒤늦게 고백을 했다. 서른 살의 여름, 한강 둔치에서 맥주 한 캔만큼의 용기에 기댄 서툰 고백이었다. 아내는 몇 주간의(며칠이 아니라) 망설임 끝에 마음을 열었고, 나는 연애 초반 약 두 달 동안 선배였던 아내에게 말도 놓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참 답답한 스타일이었다. 그만큼 조심스러웠다.
몇 해에 걸쳐 둘만의 시간이 흘렀고, 둘이 있을 때 가장 편한 사이가 되었다가, 지난해에는 결혼을 했다. 서른세 살의 봄. 지금까지 1년이 지났다. "우리가 벌써 일 년이라니"하며 새삼스럽게 웃었지만 이런 말은 전에도 몇 번 했었다. '우리 벌써 두 달 됐다', '우리 벌써 6개월 된 거 알아?', '우리 조금 있으면 1년이야'하며 때마다 흐르는 시간의 밀도를 공유했다. 그럴 때 가끔, 좋은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고 생각했다. 잡아두고 싶은 시간도 결국엔 구름처럼 흘러가 아쉬움의 여운을 남기기 마련이므로. 시간이 빠르다는 것, 지난 시간을 돌이킬 때 '벌써'란 수식이 붙는다는 것은 그 시간들이 저마다 행복의 한 조각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까지 1년, 앞으로 수십 년. 꾸준한 행복과 잔잔한 아쉬움으로 우리 공동의 삶을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 흐르는 시간에다 우리만의 흔적을 새겨 먼 훗날에 함께 웃으며 추억할 수 있기를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