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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Oct 11. 2021

사랑이라는 이름의 허무주의

34. 삶이황천길 - 「사랑의 형태」(54매)

독자가 주인공에게 동기화되기까지 1분도 안 걸리는 매우 강렬한 도입부를 지닌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이 직접 서술하는 형식으로 묘사된 상황은 한국인 독자에게 익숙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로서도 매력적이에요. 시작과 동시에 몰입하게 되죠. 인상적이었던 한 문단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삶에서 부모자식 인연이 끊어지는 순간은 생각보다 허무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강동에서 인천 남동공단까지 4년을 오가며 모은 월급, 부모님이 관리해준다고 하기에 통장을 맡겼는데 그것이 남동생의 대학 등록금과 기숙사비, 토익학원비, 용돈으로 쓰였다는 것을 일을 그만두고서야 알아버린 것이다. 인터넷에 구구절절 눈물 뚝뚝 흘리면서 글을 썼는데, 바보 같은 짓이라는 다섯 글자를 15줄로 늘여 쓴 냉소적인 댓글 보고 정신을 차렸다.


한국에서 30년 이상 평범하게 살아온 ―특히 여성― 독자라면 이런 도입부를 읽고 다음 내용을 보지 않기는 어렵겠죠. 주인공은 아마도 살면서 가족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고, 그 피해는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 삶에 고정적으로 주어진 조건이나 환경에 가까웠을 겁니다. 주인공은 장녀이고,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한국식 타산의 익숙한 희생양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단편을 끝까지 읽을 이유는 충분하죠.


이 작품의 제목 '사랑의 형태'는 사랑에 관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시사하는 듯합니다. 대체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사랑이 아닌가 하는 것이죠. 이 이야기에서 사랑은 그렇게 무결한 가치가 아닙니다. 남동생 재식의 부모가 재식에게 보였던 사랑은 어쩌면 이야기 속 'W-Ark'라는 회사가 필요에 따라 재식의 신체를 받아들인 결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불쾌함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종국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어떤 이해타산과 윤리, 필요와 당위, 그밖에 온갖 현실적 명분과 변명들의 마구잡이식 결합이 바로 우리가 아는 사랑의 본모습일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일종의 허무주의로 귀결되는 것도 제게는 매우 설득력 있게 느껴집니다.


* 소설과 리뷰 전문은 아래 링크를 이용해주세요.



소설 - 「사랑의 형태」

리뷰 - 「사랑이라는 이름의 허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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