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는 도서관 | 첫 번째 이야기
여름이 와버렸다.
그 어느 계절보다 여름에 약한 나는 여름만 되면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는다.
가혹하게도 여름은 그런 나를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그 어느 때보다 부지런해야 하는 여름. 신경 써야 할 집안일이 많기도 하다. 조금만 방심하면 끈적끈적 눅눅해지는 바닥과 공기. 방방마다 제습기를 틀었다 껐다, 에어컨을 틀었다 껐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수시로 해줘야 한다. 그뿐이랴. 조금만 방심하면 쉰내가 나는 빨래들, 곰팡이가 생기는 화장실, 쉽게 상하는 음식들, 벌레가 꼬이는 쓰레기들. 그런 와중에도 뜨거운 가스불 앞에서 방학 중인 아이들 식사를 해결해 줘야 한다. 내 속도 모르고 창밖에서 신나게 여름을 노래하는 매미들.
이번 여름은 더더욱 가혹했다. 무기력함을 떨쳐내기 위해 꾸역꾸역 나가던 산책이 재미있어질 무렵, 고약하게도 장마가, 그리고 무더위가 나를 덮쳤으니. 산책 초기 때처럼 ‘그냥 가지 말까? 그래도 가야겠지?’라는 질문을 또다시 100번 정도 나에게 던지며 현관 앞을 서성였다. 그러다가 도서관으로부터 대출한 책의 반납일이 오늘까지라는 안내 문자라도 받고 나면 ‘아, 책은 왜 때문에 집까지 빌려와설랑은!’라고 툴툴거리며 신발끈을 묶었고, ‘아, 도서관 산책에 관한 글은 왜 쓰기 시작해설랑은!’(ㅎㅎ)라고 나를 원망하며 현관문을 나서곤 했다.
챙길 건 왜 그리도 많은지. 빌려온 책 두어 권에 양산, 손풍기, 시원한 물을 담은 텀블러, 아이패드랑 무소음 키보드, 얇은 긴팔 옷(도서관이 워낙 시원해서요), 그 외에 휴지, 물티슈, 비상용(?) 사탕, 예비 마스크 등 각종 소지품까지. 늦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들의 점심을 챙겨주고 난 뒤 집을 나와 거리를 이미 장악해버린 불꽃 태양을 피해 바닥만 보고 열심히 걷기 시작. 헉하게 만드는 한낮의 열기에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고 얼굴이 토마토처럼 벌겋게 익어 터지기 직전이 될 무렵 저 멀리 도서관이라 적힌 푯말이 사막 속 신기루처럼 아른아른 보인다. 그래, 저… 저기, 저… 저기까지만 가면 살 수 있어! 이런 비장한 마음으로 마지막 힘을 내어 도서관 마당에 들어서는데, 그런 나를 앞질러 지나간 자동차에서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뽀송뽀송한 상태로 내린 어떤 도서관 이용자가 건물 안으로 얄밉게 쏘옥 들어간다. 아쒸, 뭐지? 개 부럽다. 이런 날씨에 힘들게 걸어온 나는 땀에 절인 오이지 같은데. ㅜ 이럴 땐 산책이고 뭐고 도서관 바로 옆집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다가도 그 좋다는 걷기운동을 했으니 됐다며 몹쓸 정신승리를 한 후 나도 마침내 도서관에 입성한다.
훅 불어닥치는 도서관 안 시원한 공기. 책 향기. 살 것 같다.
에어컨 바람이 직접 닿는, 그래서 너무 추워 사람들이 잘 앉지 않는 자리에 앉은 나는 가져간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10여 분 가량 멍을 때린 후에야 겨우 컨디션을 회복한다. 그제야 책도 사람도 눈에 들어온다.
한여름의 도서관 안은 늘 사람으로 북적인다. 앉을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다들 피서도 안 가는 걸까? 아니, 다들 이곳으로 피서를 온 걸까?
강낭콩 모양으로 생긴 커다란 테이블마다 거리두기를 하고 앉은 이용자들.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거나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며 각자 볼일에 집중하고 있다. 신문을 산처럼 쌓아놓고 보시는 할아버지는 오늘도 오셨구나. 등산복을 입었지만 산은 가지 않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아줌마 아저씨도 계시고. 두툼한 공무원 입시 교재를 놓고 연신 졸고 있는 취준생, 만화책 서가 앞만 서성이는 학생, 돋보기를 끼고 노트에 일본어를 빼곡하게 쓰며 공부를 하시는 할머니, 요즘은 퇴사나 은퇴 후에 날마다 도서관으로 출근 도장을 찍는 이용자들이 그리 많다던데 그렇게 추정되는 사람들도 보인다. 나처럼 땀에 절어 허겁지겁 도서관으로 들어와 한숨 돌리는 사람들도 꾸준히 발생하고 있음. 나는 이렇게 차분해 보이지만 자유롭고 한가로워 보이지만 열정적인 도서관에서 사람 구경 하는 것을 책 보는 것 만큼이나 좋아한다.
사람 구경을 하며 더위를 식히고 나면 빈자리를 찾아 나만의 둥지를 튼다. 읽고 싶어서 미리 도서번호를 알아온 책을 서가에서 가져와 읽으며 글도 모으고 생각도 모은다. 그러다 보면 아까 집에서 내가 툴툴거렸던 일도, 나를 원망했던 일도 홀라당 잊어버린다.
사람들은 왜 도서관에 올까? 나는 왜 도서관이 좋을까?
도서관에 앉아 이 글을 쓰면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책을 무료로 실컷 볼 수도 있고 집에 빌려 갈 수도 있어서? 조용하니 뭘 해도 집중이 잘 되고 딴짓을 하거나 졸고 싶어도 분위기 때문에 쉽게 그럴 수 없어서? 마치 동굴처럼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해서? 이렇게 피서를 와도 교통체증이나 바가지요금 따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서? 무료 와이파이도 빵빵하고 콘센트도 여기저기 참 많아서? 다양한 도서관 자체 프로그램이 좋아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비싼 음료수를 마실 필요도 없고, 도서관 매너만 지킨다면 몇 시간씩 한자리에 죽치고 앉아 있어도 아무도 눈총을 쏘지 않아서? 그러다가도 목이 마르거나 입이 궁금하면 도서관 안 카페에서 저렴한 가격에 음료수와 간단한 간식을 먹을 수도 있어서? 여러 형태의 좌석에 취향껏 골라 앉아 쉴 수도 있어서? 화장실이 깨끗해서? 아이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 놀이터여서? 아님 이것저것 다 떠나서, 도서관을 들락거리면 왠지 폼 나고 멋있어 보여서?
아마도 이 모든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보태자면 나는 집에 있으면 왠지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는 기분이 드는 반면, 도서관에 있으면 하루를 야무지게 채우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좋다. 세상의 문장으로, 숨겨진 지혜로, 남다른 즐거움으로 충만해지는 하루.
그리하여 나는 찌는 듯 무더운 여름에도 기어코 도서관 산책을 하고 있다. 물론 무기력을 버리고 하루를 충만히 채우려다가 더위만 배 터지게 먹으면 안 되니까, 되도록 덜 더운 시간에 덜 더운 방법으로 도서관을 다녀오려고 노력한다. ‘산책’보다는 ‘도서관’에 집중하려 한다. 나의 산책길 끝에 도서관이 있어서, 내 산책의 반환점이 도서관이어서 다행이다.
랑가나단 도서관학 5법칙에도 떡하니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도서관’. 아무리 좋은 점들을 나열하며 강추해도 여름 내내, 아니 사계절 내내 도서관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수많은 책과 함께 널찍하고 시원한 공간을 단숨에 내 서재로, 내 작업실로 만들 수 있는 행복을 나는 영영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욕심꾸러기처럼.
자, 그럼 이제는 도서관 안을 산책해 볼까? 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