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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큰 Aug 16. 2024

언니들의 이야기가 좋아서 그만


번역 일이 없어 한가한 틈에 혼자 회화 공부를 하고 있자니 문득 몇 해 전 집 근처 문화센터에서 중급 중국어 회화 수업을 들은 기억이 난다. 중국어 번역가가 통역대학원이나 통번역 학원도 아니고  일반 문화센터에서 중국어 회화 수업을 들었다고? 네. 그랬습니다!

옛날 옛적에 지방 사립대를 나와 중국인 인맥 따위는 1도 없이 집에서 번역 일만 했던 번역가는 하루가 다르게 녹슬다 못해 소멸해 가던 회화 실력을 늘 아쉬워했더랬다. 그러다가 요가를 배우러 다녔던 문화센터에 중국인 강사가 지도하는 중급 중국어 수업도 개설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강의료 부담도 적고 심적 부담도 크게 없이 오래간만에 중국어로 토킹 어바웃 할 수 있겠다 싶어 덥석 수강 신청을 했다.


일단 내가 번역가라는 사실은 선생님과 다른 학생들에게 꽁꽁 숨겼다. 그들의 기대치에 부합하지 못할 나의 회화 실력이 쪽팔… 아니, 부끄럽지 않도록 말이다. 그 대신, 과거에 중국어를 배웠는데 자꾸 안 쓰니까 까먹는 것 같아서 왔다고 대충 둘러대곤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내 뻔뻔한 거짓말을 그대로 믿은 중급반 수강생들은 모두 50~60대(70대도 한 분 계셨다) 여성들이었다. 대부분이 중국어 전공자가 아니었다. 중국어를 독학하다가 한계를 느끼고 온 사람, 중국에서 얼마간 살아본 경험이 있는데 제대로 중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온 사람, 나이가 들어 외국어 하나 배우고 싶은데 영어는 질리고 일본어는 그냥 싫고 중국어가 재미있을 것 같아 온 사람 등등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그곳에 모인 씩씩한 도전자들이었다. 다만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공통점이 있었으니, 중국어 실력이 ‘중급’이라는 타이틀에는 한참 못 미친다는 사실이었다. 앗! 내가 기대했던 건 이게 아니었는데. ;;;

게다가 수업 중간에 옆길로 새는 일도 많았다. 처음에는 진지하게 중국어 공부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교재 본문에 나오는 주제로 수다를 떠는 분위기로 흘러가곤 했다. 가령 중국 명절에 대한 대화를 배우다가 강사가 중국어로 “한국의 명절은 어떤가요?”와 같은 짧은 질문을 던지면, 질문을 받은 수강생이 중국어보다 먼저 튀어나오는 우리말로 대답하며 수다의 물꼬를 트고, 그 말을 들은 다른 수강생들이 한 마디씩 거들다가 그만 우리말 토론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선배님들(ㅎㅎ)의 대화에 낄 짬밥은 아니어서 ‘중국어 수업’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우리말 토론’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조용히 지켜볼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너무나 즐거웠다. 그녀들의 티키타카가 무척 재미있고 정겹기도 했거니와 미리 엿보는 중년 혹은 노년의 삶,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인생 조언들도 때로는 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 와중에 젊고 마음이 여린 중국인 강사가 수업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웠다.


아무튼 그런 이유들로 나는 본래의 목적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그 수업을 번역 일이 바빠져 그만두기 전까지 무려 1년이나 꾸준히 들으러 다녔다. 코로나 이후로 문화센터 자체가 없어져 다시는 그 수업을 들을 수 없게 되었지만, 유쾌한 사랑방 같았던 중급 중국어 회화 강의실은 언제까지나 그리울 것 같다.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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