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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큰 Dec 01. 2021

번역가의 명함


브런치에서 “수고했어, 올해도!” 하면서 브런치 작가들에게 작가 카드를 준단다. 실물은 아니지만 꼭 명함처럼 생겼고 모바일 카카오톡 지갑에 넣을 수 있는 카드란다. 사실 나는 여태껏 명함을 가져본 적이 없고 ‘작가님 작가님’하며 브런치에서 작가 대접받는 것도 좋아서 헤벌쭉하는 사람인지라 이런 작은 이벤트가 재밌다.


그나저나 나는 이렇게 명함도 없이 스무 해 가까이 번역 일을 하고 있는데, 다른 번역가분들은 명함을 가지고 다니실까들? 번역가들의 책이나 블로그, 번역가 카페에 ‘명함’이라는 말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걸 보면 역시 번역가들은 명함 따윈 안 만드는군 싶다가도,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요즘 시대엔 명함을 가진 번역가도 왠지 많을 듯싶다.


사실 번역가들은 ‘역서 = 명함’이라고 한다. 게다가 번역 의뢰든 원고 제출이든 모두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는 마당에 어디 마땅히 뿌릴 때도 없는 명함 거 뭣하러!

하지만 말쑥하게 각 잡힌 종이에 현재의 삶을 응집해서 박아놓은 명함은 자신의 정체성을 상징하면서도 자부심, 감성 같은 것이 분명 들어있다. 일본 만화영화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중에는 짱구 가족이 나쁜 놈 부하들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하필 짱구 아빠가 중요한 거래처 사람들을 만났는데 도망도 미루고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순간엔 악당 두목 할머니도 부하들을 말리며 “영업사원들끼리 명함을 주고받는 순간은 ‘신성한 의식’이야.”라고 말한다. 아 글쎄 그렇다니까요.


아무튼 그래서 나는  종이로   명함을 꿈꾸었다만정말 꿈만 꾸었다. 당장 급할 없는 일이라 자꾸 미루게 되네. 그래도 명함 디자인은 나름 생각해 두었다. 명함 앞면에는 ‘번역하고  쓰는 눈큰입니다라는 말만 심플하게 박아놓고, 뒷면에는 번역가라는 타이틀과  이름, 그리고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 블로그 주소 요렇게  다섯 줄만 박는 거다. (작가가 되면 작가 타이틀도 추가해서 ㅎㅎ)


뭐 요즘은 명함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검색해 보면 정말 괜찮은 품질과 저렴한 가격에, 부담스럽게 100장씩 찍을 필요도 없이 소량 주문할 수 있는 명함 제작 사이트가 많다.

20년간 한 직장을 다닌 남편에게는 회사에서 근속기념패 같은 것도 만들어주던데, 내년이면 어쨌든 20년간 번역 일을 한 셈 되는 나에게는 근속기념패 대신 명함 하나 만들어주면 어떨까? 비록 어쩌다 번역 의뢰가 들어오는 ㅜ 짠 내 나는 번역가이지만, 앞으로도 쭉 번역가로 살고 싶다는 염원을 담아 못을 박듯 ‘번. 역. 가’가 박힌 명함을 만들어주는 거다. 그래, 내년엔 꼭! n


© Abdouj,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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