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화
세 번째 연애도 실패한 뒤 더는 사랑을 할 수 없을 거 같았다. 피 터지게 싸우다 원수가 되어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내 이별은 너무나 허망했다. 상대가 좋다가도 뭔가 불편한 기류가 흐르면 극복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일정 시점이 지나면 감정이 추락하고 그대로 끝이었다. 이 패턴이 반복되자 사랑은 내가 넘을 수 없는 산처럼 거대하게 느껴졌다. 사랑은 남들에겐 작은 언덕 같아 오르기 쉬워 보이는데 내게만 에베레스트 산맥이었다. 등반을 포기하고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 그래도 실타래가 풀리지 않아 깊숙한 굴에 숨었을 때, K를 만났다.
“지영아. 네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두려움은 아빠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몰라. 네게 최초의 이성이었잖니, 아빠가.”
라고 K가 말했다.
아빠. 163cm. 두껍고 매서운 눈두덩이. 무뚝뚝하기가 경상도 중에서도 ‘상’ 경상도인 남자. 나랑 딱 서른 살 차이가 나서 나이를 세어볼 때면 내 나이에서 꼬박 30만 더하면 되는 나의 아빠.
내가 기억하는 어릴 적 우리 집의 풍경은 대부분 공기가 무거웠다. 엄마가 기분이 좋아 콧노래를 흥얼거릴 때도, 동생의 놀이터에서 놀고 들어와 더운 에너지를 집 안에 전파시킬 때도, 아빠는 별 말이 없었다. 아빠의 침묵은 집에 저기압을 불러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가 단지 내성적이어서 그런 거 같기도 한데, 그때 나는 너무 어려서 그걸 몰랐다. 아빠는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는 대신, 이상할 정도로 담배를 많이 피웠다. 담배를 피우는 게 마치 대화를 대신해주는 것 마냥, 아빠는 말을 아끼고 담배를 피웠다.
아빠가 피우던 얇은 에쎄 담뱃갑은 늘 안방의 오른쪽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매일 깨끗이 씻어낸 투명한 크리스탈 재떨이가 있었다. 안방에 갈 때면 괜스레 재떨이 모서리를 만지작거린 기억이 난다.
나는 아빠가 집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싫었는데 그만 피우라고 말해본 적은 없었다. 아빠의 무뚝뚝한 권위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담배를 안 피우면 안 되냐고 부탁하면, 암말도 못 듣고 그저 눈으로 거절당할까 봐 나도 아예 말을 안 꺼냈던 거 같다.
한 번은 중학교 1학년 때 꾀병을 부리고 학교를 가지 않았다. 집으로 담임 선생님의 전화가 왔다. 마침 집에는 아빠와 나밖에 없었는데 하필이면 아빠가 전화를 받으려고 했다. 선생님은 1학년 담임 중에 가장 자비 없기로 유명했고 내 생각에 아빠도 그다지 자비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곧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수화기 한번, 아빠 한번 그렇게 번갈아 쳐다보면서 염력으로 전화를 끊을 수 있다면! 하고 빌었다. 그러나 나는 염력이 없었고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결국 아빠가 전화를 받았다.
아빠는 그때 내가 아프지 않다는 걸 알았는데, 수화기를 들고는 그냥 지영이가 아파서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눈치껏 얘기해주었다. 그리고는 평소처럼 안방으로 들어가 티비를 보며 담배를 피웠다. 그게 끝이었다. 아빠는 내가 왜 꾀병을 부렸는지 묻지 않았고, 학교를 빠지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아무런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때 아빠는 왜 선생님께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게 아빠의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나 사랑을 오해하는 시절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때 그게 사랑인지 몰랐다. 사실은 지금도 잘 모른다. 그때 그건 아빠의 사랑에서 비롯된 에피소드였을까.
다음날 조회시간에 선생님은 내 자리로 와서 지영아, 아버님 목소리가 좋으시던데, 했다.
아빠가 목소리가 좋으면 뭘 해. 말을 안 하는데.라고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아 네, 했다.
나는 대부분의 기억을 사실(fact) 보다 감정(feel)에 입각해 기억하는 편이다. 그건 엄마를 닮아서 그렇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대학생활을 하면서 아빠를 마주칠 기회가 사라지자 점점 아빠에 대한 객관적 사실보다 아빠한테서 느껴지는 감정만을 기억하게 되었다. 아빠가 여름마다 만들어주던 비빔국수도, 뒷동산에서 잡아주던 매미도 잊고, 안방의 자욱한 담배 연기와 무거운 공기가 아빠의 이미지를 대신했다. 그 이미지는 아빠는 언제까지고 어려운 사람일 거라는 확신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기억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생각나기 마련이다. K의 한마디 말에 파편 같은 기억들이 소환되었다. K가 이어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글을 잘 못쓰는데 그래도 제 글을 많이 읽어주셔서 정말 정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아빠의 사랑은 시리즈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그럼 2화로 돌아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