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쓰기] 앤슬리 찻잔에 담긴 일화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이 찻잔은 앤슬리라는 영국 도자기 브랜드에서 만드는 제품입니다. 1700년대부터 도자기 제품을 만들어 영국 왕실에도 납품을 해오던, 오랜 전통을 가진 회사입니다. 그러나 2014년에 회사가 폐업을 하여 이제는 사고 싶어도 살 수도 없게 됐습니다.
참고로 지금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제품들은 중국에서 OEM으로 생산된 것들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앤슬리 제품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모양새도 다릅니다. 아랫부분이 뭉툭한 것이 어쩐지 가품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진짜 앤슬리 오차드 찻잔은, 그릇에는 별 관심이 없는 저조차도 한눈에 시선을 잡아끌만큼 아름답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쨍한 노란색이 안쪽의 은은한 과일색과 위화감없이 어우러지도록 색을 낼 수 있는 건지, 절로 감탄이 나옵니다. 거기다 손잡이와 잔의 굴곡이 만들어내는 유려한 곡선까지! 까만 커피든, 맑은 차든, 이 잔에 담기기만 하면 뭐든 황홀한 맛이 날 것 같습니다.
제가 앤슬리 잔을 처음 본 곳은..
제가 이 잔을 처음 보게 된 곳은 어느 부부의 부엌에서였습니다. 그릇을 좋아하던 안주인의 부엌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그릇이 있었는데, 그 많은 그릇들 중에서 오직 저 노란색과 파란색 찻잔만이 제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과거에 저는 그 부부와 시부모와 며느리의 인연을 맺은 관계로 부엌에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인데, 제가 잔을 워낙 좋아하니 너그러운 부인께서는 제게 그 잔 세트를 아예 선물로 주셨습니다.
저는 부인의 관대함을 칭송하며 잔을 집으로 가져가 커피도 담아 마시고, 차도 담아 마시고, 물도 괜히 거기다 따라 마시면서 일상의 사치를 즐겼습니다. 잔은 부엌에서 제일 눈에 잘 띄는 자리에 두었는데, 거실에서 다른 일을 하다가 무심코 부엌으로 시선을 돌리면 아름다움이 제 찬장 한 가운데에 놓여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비싼 그림을 사고 도자기를 사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을 아끼고 즐기는 마음은 자신을 조금 더 고양된 인간처럼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보게 된 아름다움
그리고 저는 바로 얼마 전에 이 잔을, 제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 두 잔을 우연한 기회에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인스타때문이었습니다. 계정을 새로 여니, 인스타에서는 자동으로 제 연락처를 연동하여 사람들의 인스타 계정을 추천해줬고, 그 중에는 너그러운 부인의 남편의 계정도 있었으며, 저는 화들짝 놀라 차단을 하려고 전 시부의 계정을 눌렀다가 그가 단 한 명의 사람을 팔로우하기 위해 인스타를 개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끝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저는 기어이 그 단 한 사람의 계정을 열어보았으며 그곳에서 그들이 촘촘하게 쌓아올린 지난 시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단 한 명의 인친은 바로 그 집의 새 며느리였습니다.
인스타라는 것은, 비록 그것이 채색된 일상이라고는 해도, 누군가의 삶을 블로그보다 훨씬 더 적나라하고 내밀하게 보여준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됐습니다. 왠지 보면 안 될 것 같은데, 하면서도 손구락이 스크롤을 내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고, 그렇게 수십장의 사진들과 함께 저 잔들을 다시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잔은 왜 그 집에 있었던 걸까요?
전남편과 이혼할 때 살림을 정리하면서 저는 저 잔들을 다시 너그러운 부인께 돌려드렸습니다. 나는 이제 4.5평 원룸으로 이사를 갈 형편인데, 앞으로 한동안은 좁고 눅눅한 곳을 전전하며 살게될 텐데, 저 아름다운 잔이 제 좁은 부엌 한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빛을 잃어갈 것이 싫었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은 그에 걸맞는 자리에 있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숙고 끝에 원래 잔들이 있었던, 환하고 넓은, 부인의 부엌으로 다시 돌려보냈던 것입니다.
그 집에 새로 들어온 여자도 그 잔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꽤 많은 사진 속에서 그 잔을 볼 수 있었고, 마호가니 원목 식탁 위에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커피 김을 몽글몽글 달고 있는 샛노란 앤슬리 잔의 모습은 중산층의 삶의 여유가 무엇인지를 한 장의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혹시, 그렇게 아끼던 잔을 새 여자가 쓰고 있는 모습을 본 헌 여자의 마음은 어떤 것일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낄낄낄낄
여러분이 예상하시는 것과 달리, 저는 의외로 묘한 우월감을 느꼈습니다.
예전에 보던 드라마에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편이 자신의 젊은 부인에게 늘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그냥 뼛가루를 이 커피 캔 속에 담아서 찬장 위에 놔줘." 그러면 여자는 무심하게 알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누가 그 이유를 물으니 남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 죽고 새 남자가 와서, 찬장 위 커피캔 속에 담긴 게 전남편의 뼛가루라는 것을 알면, 엄청 소름끼칠 거 아냐!" 그리곤 낄낄대며 웃었습니다.
제게는 저 잔이 마치 그 커피캔처럼 느껴졌습니다. 9년 동안 애지중지했으니 저 잔에는 분명 제 영혼이 한 스푼 정도는 담겨있을 겁니다. 낄낄낄낄. ... 너무 못됐나요? 에이, 어쨌든 지금 저 잔에 입술을 대고 커피를 즐기고 있는 사람은 새로운 분이시니, 너무 저를 못됐다고는 생각하지는 않길 바랍니다. 염려하실까봐 부연드리면, 말끔하게 차단도 했습니다.
아무튼 잔은 여전히 사랑받고 있고, 집안은 화목하고, 저도 잘 지내고 있으니 이 드라마는 해피엔딩입니다. 여러분도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낄낄낄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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