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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Mar 15. 2024

쓰는 사람끼리의 의리

[노파의 글쓰기] 원고 까인 날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이번 달 칼럼도 무사히 송고했습니다.

다 악플러 선생님 덕분입니다. 땡큐.



사실 3월은 제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달이었습니다.


첫 열흘은 라디오 드라마를 쓰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와중에 악플을 받았고, 누군가에게선 존중받지 못했고, 그리고 어제는 가열찬 원고 지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악플을 소재로 글을 썼고, 관계를 정리했으며, 술을 마셨습니다.


이중 지금까지 내상을 남긴 사건은 원고 지적입니다.

글은 기본적으로 내 새끼, 내 영혼, 내 분신 같은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래서 지적을 하려는 사람은 그 지적의 합당함을 충분히 설득해야 하는데, 그 부분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피디님들과 일해왔지만, 그중 한 번도 안 싸운 사람은 없습니다. 다 싸웁니다. 다들 잘 만들고 싶은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피디님과는 싸우는 과정을 통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반면, 어떤 피디님은 싸우기만 하고 끝납니다. 글 쓰는 사람에 대한 이해의 문제에서 비롯된 차이입니다.


모든 방송 제작은, 작가가 써 온 글을 어떻게 더 맛있게 요리할지 고민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 고민이라는 것은 결국, 작가의 글을 지적하고, 수정하고, 삭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피디님들은 이 과정에서 굉장히 조심스럽게 접근합니다. 글에 대한 지적이 그 사람의 내면을 얇게 저며내는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은 대부분 본인이 글을 써 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수정 요청도 구체적이고, 수정의 이유도 충분히 설득시킵니다.


그러나 글을 써보지 않은 피디님들은, 마치 공부하듯 드라마를 분석한 후 구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수정 사항을 말합니다.


“너무 관념적이다, 내 마음에 남는 것이 없다, 아닌 것 같다”라고 하는 식입니다.


정확히 어떤 부분이 관념적이고, 무엇이 마음에 남으면 좋겠는지, 이게 아닌 것 같으면 뭐가 긴 것인지, 지적하는 사람도 구체적으로 말을 해야 합일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끝내 구체적으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뭐가 마음에 안 들고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본인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고 표현하는 것, 이 역시 쓰는 사람만이 갖출 수 있는 역량입니다.


그래서 글을 안 써본 사람, 소설을 안 읽는 사람과 일을하는 것은 작가 입장에선 가장 괴롭습니다. 인간 본질, 삶의 정수 같은 클리셰 말고 구체적인 단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극본에 대한 지적 자체가 작가의 내면을 면도칼로 한 점씩 도려내는 일이라는 것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사나운 반격에 부딪히는 겁니다.


그러나 사나운 반격은 또 제 문제이기도 합니다.

보통 작가들은 이런 구체성의 결여에도 맞장구를 쳐주며 따라주는 시늉이라도 합니다.

저는 그 역량이 결여돼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방송작가로 성공하지 못하는 겁니다.



오늘은 고양신문에 제가 쓴 칼럼이 올라왔다고 해서 쓱 훑어보는데, 사진 밑에 달린 긴 캡션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김수지 작가가 쓴 라디오드라마 극본 타이틀. 커서를 부지런히 이동시키며 한줄 한줄 모니터의 여백을 채워가는 작가의 고뇌와 희열이 상상된다”


이렇게 캡션을 길게 쓰면 안 이쁜 줄 알면서도 굳이 이렇게 하는 것은, '쓰는 사람의 의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쓰는 사람들은 알기 때문입니다. 열 받고 상처받고 그러나 이내 툭툭 털어내야만 하는 그 순간의 지독함을 말입니다.


기자님의 의리와 어제 술을 사준 친구의 의리로 그럭저럭 사바세계의 매콤함을 건너가는 중입니다.

이 풍진 인생, 다들 그렇게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의리!!


PS.

지역 신문에 글을 올리면, 정발산 주차장과 창릉천 수달과 경쟁하게 됩니다. 만만찮은 경쟁자들입니다. 한 번씩 들어가서 읽어주시는 의리를.. 의리!!

https://www.mygoy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78332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376651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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