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에세이] 전세 3500, 매매 4800
엊그제는 파주로 집을 보러 갔습니다. 보성에 다녀오니 산골은 아니어도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기 때문입니다.
살고 싶은 곳은 지리산 외딴곳이지만, 인터넷과 마트, 그리고 도서관 의존도가 높은 제 현실을 반영하여 가까운 파주를 알아봤습니다.
도시에서 가까운 시골이라는 것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기에 가격이 비쌉니다. 그런데 말도 안 되게 싼 집이 있어서 동네 분위기도 알아볼 겸 가봤던 겁니다.
문산역 주변은 서울과 다를 바 없었지만, 10분만 걸어나가도 논밭이 펼쳐졌습니다. 뭔가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받으며 역에서 겨우 50분 떨어진 집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습니다.
버스정류장을 지나는데, 안에서 담배를 피우던 환갑 줄의 남자가 고개를 180도 돌려가며 저를 노려보았습니다. 참 희한한 환영 인사라고 생각하며 저도 끝까지 고개를 돌려 남자의 인사를 받아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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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도 많고 금색 논밭이 넘실대는 파주는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근처에 군부대도 많고 사람도 별로 없어서 개발 같은 건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멀리 황금 논 위로 마치 형무소처럼 우중충하게 서 있는 건물이 바로 저의 새 보금자리가 될지도 모르는 꿈의 집입니다. 외관은 낡았으나 내부는 그럭저럭 쓸만했습니다.
물론 사진과 달리 싱크대는 낡고 끈적거리고 벽에는 크랙과 곰팡이가 군데군데 번져 있으며 변기에는 눌은똥이 있었으나(ㅆㅂ) 가격을 생각했습니다. 도시가스로 난방하는 12평 1.5룸이 전세 3,500에 관리비 3만 원. 엄청나게 쌉니다.
무엇보다 꼭대기 층이라 이 집에 이사 오면 저는 마침내 윗집 소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원래 살던 집은 월세를 주면 더는 대출금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저는 돈도 많이 쓰지 않으니 첫 문장 수업만 해도 먹고 살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은, 층간 소음 없이 고요 속에서 글을 쓰는 시간이 일주일에 최소 4일 이상 확보된다는 뜻입니다. 무언가 엄청난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생각에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건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입주민으로 보이는 풍채 좋은 60대 남성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그의 손엔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는데 봉지 위로 소주병 목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습니다. 목요일 오후 세시였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건물을 나가는 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봉지를 들고 서서 저를 노려보았습니다.
그렇게 새집 마련의 꿈이 단념됐습니다.
사람에겐 기운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까 정류소에서 본 남자는 제가 맘먹고 달려들면 저를 이기지 못합니다. 기운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달랐습니다. 여차하면 날붙이를 꺼내 들 상입니다. 그런 기운의 남자를 이웃으로 두느니 산속에 버려진 집에서 뱀과 싸우며 사는 것이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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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집으로 가볼까, 생각해보지만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스무 평이 넘는 단독주택에 마당까지 딸려 있어 텃밭도 지을 수 있는 꿈의 집이, 매매가가 겨우 4,800만 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봐도 사람이 살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도시가스가 들어가지 않아 겨울철 한 달 기름값만 60만 원이 나올 것이고, 무엇보다 등기도 치지 않은 불법건축물입니다. 누구 하나만 걸리라며 내놓은 집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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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며 중국집에 들어갔는데 짜장면은 맛있었습니다. 식용유를 안 쓰고 라드를 쓰는 집이라 그렇습니다. 출발할 때 들었던 좋은 예감이 바로 이 짜장면때문이었나 봅니다.
짜장면만 먹고 갈 순 없어서 역에서 장단콩 팥소빵도 샀습니다. 장단콩은 파주 특산물입니다. 이것도 엄청 맛있습니다. 오늘의 두 번째 좋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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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노벨 문학상도 배출하고 그런 나란데, 그래서 나도 시골집에 살면서 문학에 인생 좀 걸고 싶은데, 시골집도 비싸고 대출금도 비싸고 월세는 더 비싸서 여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문학에 인생을 걸 만큼 잘 쓰지도 못한다는 겁니다. 생계 핑계를 댈 수 있어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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