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에세이] 4억 빚을 갚으시오
돈 문제 없는 작가 없지만, 도스토옙스키는 개중에도 유명하다.
그렇게 많은 작품을 썼고, 이른 나이에 이미 엄청난 유명세를 얻었음에도 그는 50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돈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60세에 사망했다.
위대한 예술가들이 으레 그러하듯, 그에겐 돈을 아끼고 절약하고 불리는 것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 절약은커녕,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악귀라도 든 것처럼 당장 꺼내 써버리지 않으면 안 됐다.
술에, 도박에, 누가 달라고 하면 없는 돈까지 퍼주는 성미다 보니 빚을 지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가 말년이라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아내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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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란 무엇인가.
돈이란 노동이고, 인내고, 시간이다.
누군가 억지로 참아가면서 일 한 시간들이 만 원 한 장에 알알이 밴 것이다.
그러니 일하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는 나로서는 돈이 너무나 귀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누가 비싼 밥을 사준다고 해도 썩 내켜 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다. 친구의 수명을 헐어서 얻은 돈을 고작 고기 몇 점과 바꾸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친구가 돈이 아주 많다면 기꺼이 얻어먹겠지만. 이래서 부자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것인데..
아무튼, 이런 이유로 살면서 누구한테 돈 빌려달라는 소리를 해 본 적이 없다.
반대로 내게 돈을 빌려달라는 사람도 없었다. 워낙 없이 산 덕분이기도 하고, 돈 빌려달라는 소리를 쉽게 꺼내는 사람은 진작에 끊어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돈을 빌려달라는 것, 그것은 수명을 빌려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정말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쉽게 꺼내서는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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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두 달쯤 전, 누군가 내게 돈을 빌려달라고 청해왔다. 새벽 3시에. 구구절절한 사정을 톡으로 보내면서.
거절했다. 수명을 내어줄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으므로.
물론 고작 1년 정도 알고 지낸, 기껏해야 두어번 밥을 먹었을 뿐인 이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사람의 사정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쪽은 서초동의 수십억짜리 아파트에서 살고, 몇백만 원짜리 옷과 몇천만 원짜리 시계를 걸치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당근에 몇 개 팔면 될 일인 걸, 자신이 누리는 것들을 무엇도 놓지 않기 위해 차라리 주변에 돈을 빌리는 사람이구나.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적자를 메우며 사는 나같은 사람에겐 여윳돈 2백만 원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2백이라니, 나의 한 달하고도 열흘 치 수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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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 만에 그에게서 또다시 연락이 왔다. 이번엔 20만 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20만 원은 쿠팡에서 이틀만 일용직을 뛰어도 나오는 돈이다. 필요하다면 당장이라도 나가서 일하면 쥘 수 있는 돈이다.
그게 싫어 주말에 일당 10만 원짜리 첨삭을 14시간 째 하는 지인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환멸에 가까운 감정이 일었다.
외국계 펀드 한국대표라는 사람이, 부업으로 청담동에 영어학원을 차렸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푼돈을 빌릴 수 있지?
모든 것이 하나의 결론으로 치닫고 있었다.
전청조로구나!
너무 야박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처음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그제야 했다. 인스타부터 카톡, 전화까지 그와의 모든 연결 통로를 차단했다.
*
전청조는 16년 형을 받았다.
내가 그의 16년을 구해줬다.
올해 최저 연봉이 2,515만 원이니 그는 내게 4억240만 원을 빚진 셈이다.
나는 너그러운 사람이라 그대의 억대 연봉 대신 최저 임금을 적용했다. 임금 상승률과 이자도 반영하지 않았다. 통 크게 240만 원도 에누리해주겠다.
그러므로 그대, 유사 전청조는 내게 4억의 빚을 졌다는 사실을 평생 기억해라.
이미 명부에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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