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또 겨울
뉴저지의 겨울은 가늘고 길다. 대략 11월부터 4월까지 이어지는데, 3월에 잠깐 봄인가 싶다가 4월에 눈이 오고 강추위. 겨울과 봄이 롤러코스터를 탄 듯 오르내리고, 앙상한 나무와 스산한 풍경이 반년가까이 이어진다. 한국과 달리 시베리아 북풍 같은 칼바람이 없어 겨울에도 구스패딩을 입는 날이 드물긴 하지만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다.
특히 뉴저지는 '가든 스테이트'라는 별명처럼 봄부터 가을까지 아름답기 그지없다. 온갖 초록들이 단풍으로 이어지는 나뭇잎들의 축제가 끝나면 거리마다 집집마다 낙엽이 산처럼 쌓인다. 그리고 길고 지루한 겨울 풍경이 이어진다. 겨울이 긴만큼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그래서 더 간절해진다. 4월이 되면 집집마다 "Welcome Spring" 사인판을 꽂는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이곳 날씨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해가 있고 없고에 따라 차이가 크다는 점이다. 해가 반짝 뜨면 영하에 가까운 낮은 기온이어도 외투 하나만 걸치면 충분하다. 하지만 해가 없으면 영상 15도가 넘는 날에도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나 나올 법한 낮은 구름들이 싸늘하게 가라앉아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가 없다.
2022년 2월, 막 미국에 정착했을 때도 그랬다. 가뜩이나 움츠러드는 데다 날씨마저 음울해 희망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바깥 활동이 적으니 우울감마저 깊어졌다. 게다가 당시에는 코비드 직후라 아시안 혐오 사건들이 종종 뉴스에 보도되곤 했다. 지하철에서 아시아 여성을 밀쳐 떨어졌다는 흉흉한 뉴스까지 있어 밖으로 나서기가 무서웠다.
나는 걷는 걸 좋아한다. 한국에서도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1시간씩 걸었다. 출근 전 걷기는 내 삶의 일부였다. 걷다 보면 많은 것들이 선명해지곤 했다. 하지만 이곳은 총기사고도 많고, 이웃이 어떤 사람들인지도 모르는데 아침 운동을 나선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근처에서 공원을 발견했다. 아들을 학교에 내려주고 그곳으로 향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차를 하고 내려보니 나와 다른 피부, 눈동자,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각자의 속도로 여유롭게 걷고 있었다. 강아지, 연인, 부부, 친구, 때론 나처럼 혼자인 사람들이 총도 마약도 없는 상태로 선량한 표정으로 아무런 경계와 두려움 없이 그저 걷고 있었다. 그들 속에 섞여 나도 한 발을 내디뎠다.
한 바퀴를 돌고 나니 50분. 행복했다.
"행복해" 조그맣게 속삭이다가 큰 소리로 외쳤다.
"행복해!"
미세먼지 하나 없는 맑은 공기, 파란 하늘, 내가 지금 숨쉬고 있다는 사실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날 이후 나는 매일 어학원에 가기 전, 공원 한 바퀴를 돌았다. 만나는 사람들과 웃으며 "Good morning" 인사를 나눴다.
매일매일이 새로웠다. 매일매일의 공기가 다르고 하늘이 달랐다. 바람이 다르고 햇살이 달랐다. 생동감이 느껴졌다. 변해가는 풍경과 함께 다리 근육은 단단해지고, 마음 근육도 건강해졌다. 어떤 날은 지브리 OST를 듣고, 어떤 날은 잔나비를 듣고, 어떤 날은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를 들었다.
지나친 불안, 지나친 걱정,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염려하며 작아질 필요가 없었다. 미국이지만 이곳 역시 사람 사는 곳이고, 세상은 살만하며 선량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걷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 어느덧 미국 생활 3년 차가 되어간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무작정 걸었는데, 걷기가 나를 살렸다. 여전히 모르는 것도 많고 서툴지만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참 많이 걸어왔다. 내가 계획했던 시간들의 전반전이 감사하게도 이렇게 마무리되어 간다. 다시 시작하는 후반전도 지금처럼 잘 걸어가 보자고 다짐해본다.
오늘의 메시지
걷다 보면 불안은 줄고, 삶은 단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