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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유럽연구소 Apr 21. 2021

혐오를 이용하는 정치

트럼프가 한국엔 없을까?

나의 북유럽 친구들은 트럼프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트럼프가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평가는 냉정했다. 하기야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툭하면 스웨덴에 이민자가 늘어나 범죄가 늘었다며 맥락 없이 과장해 언급했고,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미국에 팔라고 했다가 그린란드는 물건처럼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는 덴마크 총리의 답변이 불쾌하다며 정상회담까지 취소했으니 북유럽 사람들 보기에는 뭐 저런 사람이 대통령인가 싶었을 것이다.
  

트럼프가 왜 그렇게 싫으냐고 물었을 때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트럼프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사람이라는 것이다. 일거수일투족이 뉴스가 되는 트럼프 같은 사람이 이민자가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았다 선동하고, 특정 인종을 범죄자나 테러리스트로 낙인찍으며 증오를 부추기는 모습에 익숙해지면 평범한 사람의 마음속에 작은 불씨로 남아 있던 의심과 불안이 확신이 된다고 했다. 개인적인 경험을 전체로 치환해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로 분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공동체가 지켜야 할 기준을 허물어뜨렸다. 누구나 불편한 일을 겪는다. 그 경험이 특정 인종이나 국적, 성별이나 연령대와 관련됐을 수도 있다. 남 탓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상대가 약자이거나 특정할 수 있는 집단일 때는 더욱 쉽다. 하지만 해서는 안 되는 말과 행동이 있다. 당장 속은 시원해도 결국은 더 큰 혐오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쿡쿡 찔러 힘을 실어주었다. 트럼프 같은 강자가 장애인을 조롱하고 특정 인종을 탓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뜩이나 화가 나 있는 사람들 사이에 ‘약자를 괴롭히고 이민자를 욕해도 되는구나’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된다. 실제로 트럼프가 집권한 이후 전 세계 극우가 세를 키웠다.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 등장하는 혐오와 폭력, 증오가 가득한 댓글을 보면서 2017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떠올랐다. 그날 공로상을 받은 영화배우 메릴 스트립의 소감은 듣는 이를 멍하게 만들었다. 웃고 떠들던 관중이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닦았다.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던 메릴 스트리프의 말, 트럼프를 향했던 그 말을 대한민국 정치인에게 그대로 전해야겠다.


“배우의 역할은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는 이가 그 삶을 느끼도록 하는 것입니다. 올해는 강렬한 연기가 아주 많았습니다. 숨이 멎을 것 같았고 연민을 불러일으켰지요. 그중에서도 올해 저를 깜짝 놀라게 한 연기가 있었습니다. 심장에 사무치더군요. 연기가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요. 하지만 효과적으로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관중을 웃게 했고 이를 드러내며 분노하게 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이 장애가 있는 기자를 흉내 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그 기자와 비교할 수도 없는 특권과 힘,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는 제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도 머릿속에서 그 장면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영화가 아닌 현실이었거든요.
상대에게 굴욕을 주고 싶어하는 본능, 누군가 힘 있는 사람이 공식 석상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 그것은 모든 사람의 삶에 그대로 스며듭니다. 똑같이 해도 된다고 허락해주는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혐오는 혐오를 낳고 폭력은 폭력을 부릅니다. 힘 있는 자가 그 위치를 이용해 약자를 괴롭히면, 우리 모두 피해자가 됩니다.”


최근에 회자된 정치인의 발언이 귀에 박혔다. 부잣집에서 태어나면 ‘자제분’ 대우를 받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밥을 먹을 때마다 ‘세금급식’에 고마워하기라도 해야 하나? 강남이 아닌 강동, 강서, 강북은 그저 ‘비강남’인가? 맘에 안 든다고 ‘외눈박이’ ‘절름발이’ ‘치매환자’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가? 공권력이 투입되어 경찰 포함 6명의 시민이 사망한 일을 두고 ‘매우 폭력적 형태의 저항’이 있었다는 표현 대신 ‘다시는 벌어져서는 안 되는 비극’이라고 할 수는 없었을까? 과거 선거에서 진 이유가 ‘특정 지역 출신’과 ‘양꼬치 거리에 사는 귀화한 조선족 몇만명’ 때문이었을까? 진심이라면 문제고 전략이라면 나쁘다.


한쪽을 무조건 적폐로 치부하는 것도, 시류를 따라 사는 것이 탐욕인 것처럼 백안시하는 것도, 누군가의 성취를 잘못인 양 몰아가는 것도... 우리 사회는 왜 늘 서로를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일까? 남의 성공은 다 불법이 있다 여기고, 남의 불행은 다 능력이 부족하다 여겨서 인정하지 못하는 걸까? 어떻든 함께 살아야 하는데 존재를 부정하면 어쩌자는 건가? 통합을 위해 노력은커녕 혐오를 이용해 지지율을 높이려는 정치인을 어떻게 봐야 할까?


혐오는 무시에서 시작된다. 강자의 언행은 기준이 되고 면죄부가 된다. 부정적인 말은 전염이 빨라 서로를 부추기고 점점 잔인해진다. 부끄러움도 죄책감도 사라진다. 공공연한 혐오의 말은 어느 날 물리적 폭력으로 변한다. 연일 언론에 등장하는 분들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자신을 위한 정치가 아닌 사회를 위한 정치를 하시라. 혐오를 동력으로 하는 정치는 우리 모두를 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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