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의 대화
나는 아버지와 자주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지만, 한 번 대화의 포문을 열 때면 반드시 하나쯤은 생각할 거리를 얻게 된다. 거창한 깨달음 같은 것이 아니더라도 색다른 느낌을 받는다.
얼마 전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당신은 나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주저앉지 않고 계속해서 이상을 바라보는 희망을 꿈꿀 수 있는지. 그 무궁무진한 에너지는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내 힘으로 아무것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막막한 순간에 어떻게 해답을 얻었는지.
아버지는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변화의 힘을 믿었다. 그는 개개인 한 명이 지닌 변화의 힘을 믿는다. 모두가 달라지기는 어렵겠지만, 한 명이 다른 두 명에게, 다른 두 명이 또 다른 두 명에게, 퍼져나가다 보면 세상이 조금씩은 바뀌어 있을 거라고.
아버지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생각했다. 그는 나보다 오랜 세월을 겪었고 세상을 더 잘 알 것이다. 나는 그가 겪은 사회의 절반도 채 직면해 본 적 없다. 그런데 나는 왜 아버지보다 세상을 믿지 못할까?
아버지는 나름 성공한 기성세대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선두주자로 혈혈단신으로 지방에서 올라와 성공하였고, 지금은 정년퇴임을 목전에 두고 있다.
나는 사회에 의해 정의 내려진 20대다. 제멋대로에 이기적인 MZ세대, 끈기 없고 어른을 존경할 줄 모르는 철없는 세대.
20대가 기성세대에 비해 뒤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하지만 내가 의문을 품은 것은 희망의 척도에 관한 문제였다. 왜 어린 나보다도 아버지는 희망을 믿을 수 있는가. 개인의 성격 문제를 떠나, 어쩌면 세대가 겪어온 성취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룬 세대이다. 대학 시절 운동권에 있었고, 국가가 개발되고 경제가 성장하는 것을 목격하였고, 2016년에는 광화문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었다.
반면 나는 사회와 상호작용한 적 없다. 사회와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곧 집단에 대한 소속감과 애착으로 이어진다.
나는 나의 국가와, 사회와, 사람들과 호흡한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얼굴을 맞대고 정서를 공유한다고 느끼는 자들은 그저 내 주변에 살아가는 개개인뿐이다.
지난 국민연금 공론화 회의를 보면서 이것을 더욱 실감했다. 젊은 세대는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대게 인터넷상에서 분노를 터트렸다. 그것이 그들에게 가장 익숙한 일이다. 윗세대의 결정에 분노하는 일.
나는 소모적이고 무조건적인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자고 나란 이 땅을 좋아하고 떠나고 싶지 않다.
다만 단순히 지속 가능한 미래와 사회를 위해서, 애정을 가지고 살아가며 이 집단을 유지해 나가야 할 어린 세대를 위해서, 사회가 우리를 위한 작은 변화를 내줘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헛된 희망이라 할지라도.
나는 사회와 호흡하며 살아가고 싶다. 이 글을 쓰는 것 또한 아버지가 말한 희망을 믿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가 꿈꾸는 희망을 함께 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