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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내가 좋아하는 작은 것들 01

by 노루

내가 어렸을 때는 동네에 문구점이 꼭 몇 개씩 있었다. 사실 그때는 문구점이 아니라 문방구였는데 영아트, 바른손, 모닝글로리 같은 유명한 문구 팬시점 말고도 00문구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코딱지만 한 구멍가게들이 있었다. 문 앞에는 뽑기나 오락기가 있고 주인아저씨는 학생들의 준비물을 다 꿰고 있던. 성인 한 명 들어가기도 비좁은 그 문구점에서 내가 제일 좋아한 것은 지우개였다.


하얗고 단정한 네모모양부터 캐릭터 모양에 퍼즐모양으로 조립이 가능한 재미까지. 그 시절 지우개는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요즘 문구점에는 수입 지우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편이지만 나는 그 질서 없이 알록달록하고 어딘가 불량식품처럼 화려한 색색 지우개들을 보면 별천지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한때는 옷 입히기 지우개에 빠지기도 하고, 한때는 인기 캐릭터가 인쇄된 지우개를 넋 놓고 구경하기도 했지만 역시 가장 좋은 것은 흰색의 납작한 육면체 형태를 가진 지우개였다. 작은 종이 띠지가 디자인의 전부였던 300원짜리 지우개. 그 지우개를 손에 쥐고 만지작 거리면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이 참 좋았다. 다 같아 보여도 지우개마다 부드러운 정도와 약간의 투명한 정도가 달랐다. 크기와 길이가 달랐고 나는 그걸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필통이 작을 땐 지우개를 칼로 자르기도 했었는데 속이 꽉 차 천천히 칼날에 갈라지는 하얀 지우개가 좋았다. 지우개의 쓰지 않은 면은 손으로 만지면 참 매끄럽고 부드러워서 특히 좋아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지우개를 조금 쓰다가 금방 새 지우개가 쓰고 싶어 지곤 했는데, 그래서인지 지우개를 끝까지 다 써 본 기억은 없다. 반 이상 사용해 띠지도 없어지고 연필자국도 많이 나고, 샤프나 볼펜으로 찍어버린 자국도 몇 개씩은 가지고 있는 낡은 지우개가 되면 은근슬쩍 지우개를 버리거나 자르기도 했다. 그리고 새 지우개를 꺼내 괜히 무언갈 쓰고 지워보았다. 잘 지워지나 확인한다는 핑계 삼아.


잘못된 연필자국에 몸을 부비는 지우개에는 틀려도 된다는 너그러움이 있었다. 그땐 얼마든지 지우고 다시 쓰고 또 백 번을 지우고 천 번을 지워도 됐다. 지우개를 쓸 일도 없이 어느새 다 커버린 지금의 나는 한 번의 실수로 곧잘 무너지는데. 이제 지우개 하나쯤은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게 된 건 지우개를 쓸 필요가 없어져서일까, 아니면 지우고 다시 쓰느니 종이 한 장 정도는 찢어버리고 새로 볼펜은 휘갈기게 되는, 다급하고 초조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까. 지우개를 만지작 거리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했던 기억이 남아서 나는 아직도 문구점에 가면 지우개 코너를 유심히 구경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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