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과 졸업생의 직장생활 적응기 11
나는 항상 인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이 다행히도 내게 적의를 품지 않고, 이유 없이 나쁘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간혹 있다고 들었다. 나는 주로 사람들을 처음 만나면 굽히고 들어가는 편이었다. 먼저 웃고 먼저 나의 바보 같음을 내밀며 딱딱한 분위기를 무너뜨리는 편이었다. 실제로 나는 머리가 좋은 편도 아니고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전략 같은 것도 모른다. 직장에서도 그랬다 아무나랑 잘 지냈고 비슷하게 대했다. 그러면 대체로 사람들은 나를 잘 대해줬고 그 안에는 옅은 무시가 깔려있는 경우도 있었다.
사수가 없지만 그래도 최종 컨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을 사수라고 생각한다면 본부장님이 있었는데, 본부장님은 참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누구에게나 편하게 대했고 일상을 잘 이야기하며 분위기를 풀어주셨다. 임원처럼 대하지 않고 동료처럼 대해주셨다. 큰 문제가 없는 일이라면 누구에게나 오케이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오케이가 자꾸 나한테 돌아오는 게 문제였다. 공장에서, 계열사에서 들어오는 일이 너무나 쉽게 김주임한테 전화해~ 가 되었고, 그다음에는 그냥 바로 나한테 연락이 들어왔다. 나는 팀도 없는 사람처럼 모든 일을 다이렉트로 전달받았는데, 고객센터 전화기도 내 자리에 연결되어 있어서 전화만 울리면 일이 생기는 셈이었다.
근데 그 일이 너무 각양각색이라는 게 문제였다. 블로거 리스트업을 하고 있었는데 전화를 받으면 디자인을 해야 했고, 전화를 받으면 고객문의를 처리하러 택배사에 전화를 돌려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통화를 마치고 나면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정말 신기하게도 일은 쏟아질 때만 무섭게 쏟아졌다. 처음에는 누가 일을 주면 보고를 하라던 본부장님이었는데, 나는 이 일을 어디까지 보고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보고할 시간도 없이 일이 쳐들어와서 보고를 놓치기 일쑤였다. 그래도 본부장님은 여전히 좋은 사람이었다. 김주임한테 말해봐~.로 통화가 끝날 때면 나는 사무실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거래처 매장 관리와 웹디자인, 계열사의 매장 디자인, 온라인 홍보 업무, 프로모션 기획을 포함한 자사몰 관리, 온오프라인의 고객 응대를 한 번에 하고 있자면 스케줄러의 하루 칸을 넘어서는 일이 나를 기다리곤 했다. 나한테는 모두 중요한 일이고, 놓치면 안 될 일이었는데 막상 회의 때 보고할 일은 많지 않았다. 회의 때 나오는 말이라고는 이번 주에 누가 어느 거래처에 얼마를 팔았느냐, 앞으로 팔 수 있을 것 같으냐, 팔았던 건 어땠느냐가 전부인데,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근데 나는 이상하게도 회의에 매번 불려 들어갔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입 다물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매출이 없으니까.
처음엔 누가 궁금해하든 말든 회의자료를 내 업무로 채웠다. 어떤 용기의 띠지를 디자인하고 어떤 홍보를 하기 위해 무슨 준비를 하고 있고 고객 반응 중에 이런 게 있고 계열사의 홍보를 위해 어떤 전단지를 만들었고. 근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회의시간에 내 페이지가 나오면 프리패스가 따로 없었다. 아무 반응도 없이 0.5초 만에 모두 넘어가버린 내 회의자료를 보며 나는 회의자료 만드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졌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영업 거래처도 맡게 되었다. 그 전의 업무는 하나도 줄지 않은 채.
그렇게 무언가 내게 자연스럽게 넘어올 때, 그건 못하겠어요.라고 대답했다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한다. 그랬으면 나는 좀 덜 힘들었고, 조금 더 회사를 오래 다닐 수 있었을까. 그 사람 좋은 얼굴로 내 일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던, 어려운 거 아니라며, 이렇게 이렇게만 하면 돼! 하던 본부장님은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