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작은 것들 24
최근 본의 아니게 크런치 모드다. 회사에서 새로운 서비스가 오픈하며 야근, 야근, 야근, 야근 혹은 저녁에 일 가져오기, 주말에 일 가져오기가 나쁜 습관처럼 지속되고 있었다. 회사를 쉬는 동안 온전히 내 담당이었던 집안일의 추가 순식간에 남편에게로 기울어졌다. 남편은 그걸 제법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잘 처리해 준다.
우리 집안일은 꽤 잘 나누어져 있다. 음식, 청소기, 주방 관리, 장보기는 내 몫이고 남편은 구독 서비스나 새로 살 물건들의 가격을 비교하며 최선의 결정을 해내고, 제도적인 문제나 관공서, 어떤 서비스센터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들을 기꺼이 처리한다. 통신, 금융, 예약, 결제, 수리, 뭐 그런 진짜 생각하기 싫은 것들을 대신해준다. 화장실 청소와 식기세척기 담당도 남편이다. 빨래는 아무나 보는 사람이 먼저 하고 걸레질은 남편이 한다. 쓰레기는 같이 한 번에 버리러 나간다. 일의 빈도나 양으로 보면 내가 더 바쁘겠다 싶지만 내 일은 주로 복잡한 생각이 필요치 않은 일이다. 남편의 일이 꽤 자질구레한 고민과 선택의 기로를 연속해서 밟아나가는 과정인 것에 비해.
저녁을 거의 같이 먹지 못했다. 남편의 밥을 차려줄 수 없었고, 남편은 혼자 알아서 시켜 먹거나 꺼내 먹었다. 뒷정리도 내가 손대지 않도록 깨끗이 처리했다. 그러다 지친 정신줄을 붙잡고 밤늦게 퇴근해 냉장고를 열었는데, 새벽배송으로 시킨 계란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누군가 계란판에 삐뚤빼뚤 적어둔 유통기한이.
나는 계란을 사면 냉장고에 넣으며 플라스틱 뚜껑을 벗기고, 유통기한이 적힌 작은 속지를 버리며 계란판에 빨간펜이나 네임펜으로 속지에 인쇄되었던 유통기한을 옮겨 적는다. 그렇지 않으면 종이를 버리고 나서 유통기한을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그걸 똑같이 해놨다. 둘만 사는 집에 누구겠어, 우리 남편이지.
집안에서 낯선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질 때가 있다. 바닥을 보이던 주방세제가 채워져 있다거나, 늦게까지 자리를 차지했던 겉옷이 들어가 있거나. 소파에 뒹구는 담요에서 갑자기 섬유유연제 냄새가 난다거나 하는 일들이다. 내가 모르는 과정이 어느새 지나가고 결과가 눈앞에 있다. 집안일만큼 티 안 나는 일이 없다던데, 그걸 아무 생색 없이 묵묵히 해주는 남편이 고맙다. 내가 발견하는 것보다 많은 일들을 할 것이다. 내가 언젠가 그랬듯이. 새삼 느껴지는 것이다. 이게 부부구나. 같이 사는 거구나. 남편의 손이 닿은 우리 집은 그걸 알기 전보다 아주아주 포근하고 아늑하고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