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 년 만에 몸살을 앓다

역시 건강한 것보다 큰 복은 없다

by 루파고

감기도 잘 걸리지 않던 나는 어처구니없게 몸살을 앓았다. 괴로운 걸 참으며 꾸역꾸역 입 안에 넣은 음식이 다음날 탈을 일으킨 것이다. 불편한 속을 달랠 생각으로 냉장고에 달랑 하나 있던 청량음료를 마셨고 잠시 후부터 속이 부대끼기 시작했다. 장 트러블은 없었지만 위에서 불편함이 느껴진 것이다. 점심은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어제 쓴 빗맞아도 30년, 15화-미쉐린가이드5관왕 피양콩할마니 편 참조)을 먹어서 조금 진정되는 듯했으나 오후 들어서 몸 상태가 점점 더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살짝 몸살 기운이 있나 싶었는데 역시 예상대로였다. 강철 같던 내 몸도 이젠 어쩔 수 없는 모양이란 생각이 들었다. 잠이 보약이란 말을 떠올린 나는 편의점에 가서 생전 먹지도 않는 죽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역시 먹지도 않던 위장약을 짜 먹고 죽을 약간 따뜻하게 덥혀 퍼 먹었다. 뭐라도 먹어야 빨리 나을 테니까. 아무튼 생존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은근히 걱정은 하는 모양이다.

이런저런 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켜 놓은 나는 충분한 수면으로 몸살을 이겨 내기로 했다. 보일러 온도는 있는 대로 올려놓고 영하 20도가 된다 해도 안 입는 내복을 꺼내 입었다.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자면 나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역시 잠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제일 재미없는 영화를 틀어놓고 잠을 청했지만 초저녁부터 잠을 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재미없는 영화를 끝까지 다 보고 말았다. 기적이었다. 차라리 몇 년째 읽다 포기한 책을 읽을 걸 그랬나 싶었는데 역시 재미없는 영화는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지루함의 끝은 졸림을 가져왔다.

정말 죽기 살기로 오래 자고 싶었는데 7시를 넘기지 못했다. 억지로, 억지로 자려고 노력했지만 드문드문 깨면서 8시까지 누워 있었고 그것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 침대에서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몸 상태는 많이 좋아진 듯했지만 아직 100% 원 상태로 돌아온 건 아니었다. 하루는 제대로 요양하자는 생각에 집 밖으로는 얼씬도 않고 처박혀 있기로 했다. 이렇게 아무 짓도 안 하고 있으려니 역시 글 쓰는 것 외엔 할 일이 없었다. 이상하게 독서엔 관심도 안 간다.

백만 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몸살을 앓고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으며 시간 죽이기를 해보니 이건 정말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절감했다. 뭔가 하지 않으면 불안함을 느끼는 것도 문제겠지만 의미 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건 아무래도 내 체질은 아니다. 아직 힘도 철철 넘쳐흐르고 정열도 게이지 만렙인데 뭔들 못 할까? 오랜만에 아파본 경험으로 건강의 중요성과 시간의 귀중함을 다시금 새겨 보며 오늘 하루는 어떻게든 최대한의 요양으로 버텨 보려 한다. 쉬는 것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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