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난을 당했다.
어쩌면 표현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조난이라 하기엔 아직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기회가 있다는 말은 아직 판단력이 살아있음을 의미하고 내 의지에 의해 나를 움직일 수 있다는 거니까.
동료를 잃고 24시간 가까이 굶주린 상황인 데다, 기온은 영하 20도가 넘었으며 체감 온도는 영하 30도는 되는 것 같았다.
수십 년만의 악천후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기상 돌변 상황이 복합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12월 30일, 이제 새해를 이틀 앞둔 상황이었다.
다음 연도를 기약할 수 없는 일촉즉발의 예측 불가한 현실이 암흑과 함께 뇌 속을 스며들기 시작했다.
눈폭풍이라는 표현이 맞을까?
차라리 폭설이 내렸다면 기온은 더 낮아지지 않았겠지만 기상은 악화일로였다.
이미 허리 깊이로 쌓여가는 눈 때문에 한 걸음 한 걸음이 어려운 상황에 이르고 있었다.
바람은 점점 강해져 그야말로 눈발 짙은 폭풍 수준이 됐고 시야도 흐려진 데다가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음에도 먹구름이 하늘을 덮어 천지분간이 어려웠다.
왔던 길을 돌아가는 걸 고려해 봤지만 지도상 우리가 위치한 곳은 원래 목표로 했던 방향으로 가는 게 나을 거란 판단이 섰다.
어쩌면 돌아가는 게 나은 결정이었을 순 있지만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바른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날이 선 절벽 끝에 간신히 걸음을 옮겨야 했던 상황이라 뭐라도 먹을 방법이 없었다.
체력은 바닥이 나기 시작했고 몸에선 열기를 내지 못했다.
악천후 때문만은 아니었다.
눈보라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란 아예 전무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악천후의 끝은 예상할 수 없었고, 내가 선 곳이 바른 길 위에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나마 혼자가 아닌 둘이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혼자였다면 나의 의지는 쉽게 꺾여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몇 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8시가 넘은 시간이었던 갓 같다.
경사진 오르막길은 눈보라 때문에 5미터 앞도 보기 어려웠고, 이젠 오로지 앞을 향해 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는 상황.
우린 바닥난 체력도 문제였지만 공포스러운 암흑 속 암벽에 매달려 버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경사가 조금이라도 적은 곳을 찾아 몸을 쉬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곳이 약 20도 정도 되는 경사진 곳에 어떻게든 몸을 끼워 넣을 바위틈인데 1미터 옆이 가파른 절벽이라 행여 실수라도 하는 날엔 그야말로 죽음과 직결이었다.
우린 바위틈에 고정용 장비를 장치하고 배낭과 장비들을 묶은 후 로프와 하네스를 연결한 후에야 침낭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실상 누웠다기보다는 바위에 기댔다고 보는 게 맞다.
이미 꽁꽁 얼어버린 발은 침낭 안에서도 녹을 것 같지 않았고 플라스틱 비브람 외피는 눈보라에 그대로 방치된 채 꽁꽁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몸을 뉘고 나니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배낭 안에 있는 거라곤 비상식품뿐인데 그것도 이미 꽁꽁 얼어버린 채였고, 몸을 움직여 배낭을 열고 뭔가 먹는 행위를 할 힘도 없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 있던 육포를 생각해 냈고 선배에게 나눠줄 것인지 고민하는 나를 발견하고 스스로 자책했다.
나를 욕한 후 선배에게 육포를 주려 했더니 선배는 필요 없다 했다.
나중에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역시 비상식량으로 지니고 있던 육포를 물고 있었던 거다.
난 생사를 함께 한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우리보다 나를 더 중요시했던 짧은 시간이 그토록 부끄러웠다.
그놈의 주머니 속 손바닥 만한 육포 한 조각조차 나누는 걸 고민했던 내게 진정한 동료애가 있었던 것인지 지난 세월 동안 수십, 수백 번을 자문했다.
나눴다면 과연 조금이라도 더 큰 육포를 주었을까?
지금도 모르겠다.
내 속에 머물러 사는 나라는 인간의 본질은 나를 위한 놈이 분명할진대...
그놈은 내가 아닌 것도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