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뿐

돌배나무집 셋째 딸 Vol.24

by 루파고

역시 살아보니 살아지는 게 인생이다. 지유는 두 아들 키우는 것 외엔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그저 살아지니 살아진다는 말처럼 살았고 그러다 보니 드디어 목적했던 때가 왔다. 몇 해 전 지유는 진수를 앉혀 놓고 자신의 소망에 대해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지유는 진수와 명수가 대학까지 마치고 자립할 수 있을 때가 되면 홀로 시골에서 조용히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어청도에서의 짧은 시골 경험을 하며 그런 생각의 싹이 텄다. 삶이 팍팍하게 느껴지고 삶의 목적이 사라지자 싹이 무럭무럭 자라서 너무도 강렬한 소망으로 변해 있었다. 의외로 진수가 군말 없이 찬성하자 지유는 무척 놀랐다. 엄마의 삶을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말에 눈물을 흘릴 뻔했다. 며칠 후 명수도 앉혀 놓고 물었는데 시골이 생기는 거라며 열성적으로 찬성했다. 오히려 지유가 일찍 꿈을 이루는 게 좋겠다며 종용했고 며칠을 고민 끝에 두 아들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지유는 두 아들이 계획보다 일찍 품을 떠나게 만드는 게 내심 불안하기는 했다. 반면 이제는 스스로 할 일 다 할 수 있는 성인이라 크게 걱정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지유는 아이들에게 남들보다 잘해 준 것은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남들보다 못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게 정성을 다해 키웠고 아이들의 앞날은 그들 스스로의 몫이라는 걸 인정했다. 지유도 아이들도 자신의 인생을 사는 거다.


지유는 이듬해 인천 인근에 있는 섬에 텃밭이 딸린 허름한 집을 사서 허물고 열다섯 평짜리 아담한 집을 지어 이사했다. 지유의 소망이었던 전원에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텃밭을 일구고, 산에서 약초를 캐고, 바다에서 조개도 캤다. 조합에도 가입해서 바지락과 굴을 채취해서 넉넉지는 않았지만 생활비도 조달할 수 있었다. 이제는 돈에 쫓기지 않고 뭔가에 눌리지도 않는 지유만의 온전한 삶이 시작된 것이었다. 처음 시작한 농사일은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지만 직접 재배해서 먹을 정도는 수확할 수 있었다.

친구들보다 한참 늦게 입대한 진수는 두 번째 휴가 때, 삼일 만에 섬으로 찾아들어올 수 있었다. 이사하고 진수에게 약간의 용돈과 함께 편지를 보냈는데 진수에게 전달되지 않아서 이사 소식을 몰랐다는 것이다. 편지에 돈을 동봉할 경우 우편물이 분실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했다. 진수는 이틀 만에 바뀐 집 전화번호를 알아냈지만 이미 배편이 끊겨 삼일 째 되던 날에서야 집을 찾아들어올 수 있었다. 지유는 오랜만에 진수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군인이 된 진수의 모습에서는 남편 정미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날 지유는 꿈에서 정말 오랜만에 정미소를 보았다. 꿈을 꾸며 그게 꿈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행복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때뿐이었다. 진수는 제대 전 마지막 휴가인 말년 휴가마저 집에 머무르는 날이 하루 이틀 밖에 되지 않았다. 진수가 근무하는 부대는 강원도 깊은 산속에 있다면서도 휴가 때마다 등산을 갔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찌 보면 진수의 그런 모습이야말로 지유 자신을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진수는 군대 전역 후 명수의 자취방에서 함께 지냈다. 겨울이 되자 매년 그랬던 것처럼 설악산에 간다는 진수의 전화가 왔다. 이번엔 또 며칠 동안 다녀온다는 건지, 어딜 또 다쳐서 돌아오는 건 아닌지... 지유는 걱정이 앞섰지만 진수는 말려질 고집이 아니었다.

이번 겨울에도 뉴스에서 등산객 조난사고가 방송되곤 했다. 그런데 전과 달리 눈도 자주 내리고 적설량도 상당해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진수가 간다던 설악산에서는 빙벽등반 훈련 중이던 산악인들의 사고 소식이 방송되나 싶더니 조난사고 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하룻밤 사이 눈이 이 미터나 내렸다는 뉴스가 있었다. 분명 진수는 설악산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지유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진수의 선배에게 연락을 취해보았지만 그도 정확한 소식을 알지 못했다. ‘그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지유는 진수의 무사귀환을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뉴스가 방송되고 다음 날 아침에도 방송에서는 온통 설악산, 오대산 일대의 조난사고 소식만 들려왔다. 진수 선배에게서도 새로운 소식은 없었다. 어청도에서 명수가 바다로 빨려 들어가던 모습을 보았던 그날처럼 지유의 가슴은 심하게 요동쳤다. 심장마비에 걸릴 것처럼 신경이 날카로웠다. 어차피 산속에 있으면 통신이 연결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유는 진수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벌써 이틀째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텔레비전을 껐다 켰다 지비 밖으로 나갔다가 그냥 들어왔다 하는 초조한 행동만 이어졌다. 그날 저녁 늦게 드디어 진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전화 스피커로 들려오는 진수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다치거나 한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방송에 나온 그런데 있었던 게 아닌데... 산에서 내려와서 전화 터지는 곳 찾아서 바로 전화했어. 엄마~ 걱정할까 봐! 그리고 눈이 많이 오긴 했지만 설악산에서 조난사고 난 것도 이제야 알았어. 우린 절대 안전하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이제 완전히 산에서 내려와 있고, 며칠 있으면 집으로 갈 거야.”

다행히 진수는 별일 없었다. 하지만 사실 진수 역시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곳이 이름만큼이나 위험한 곳인지 몰랐기에 다행이었던 거다. 다음날 진수에게서 조난사고 현장에 구조활동 때문에 올라간다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지유는 뉴스를 통해 진수가 말했던 대로 구조 현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구조현장 속 많은 사람들 속에 진수도 끼어 있을 것이었다. 지유는 진수가 당사자가 아니라 정말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었지만 조난된 사람들의 부모 심정을 생각하니 진수와 연락이 닿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며 느꼈던 공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 후 진수는 사업을 하겠다며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데 지유에게 보증을 서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러나 지유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같은 해 겨울, 진수는 해외로 원정등반을 떠났다. 뻔히 말릴 것을 알고 그랬겠지만 정작 출국 전날 전화 한 통 남기고 날아간 것이다. 진수는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일정이라고 했다. 군대 입대할 때도 화장실에 간 사이 '엄마~ 군대 다녀올게~'라고 소리치며 달아났던 녀석이다. 진수는 일찍이 홀로 된 엄마의 눈물을 보는 걸 죽도록 싫어했던 거다. 산이 좋아서 등산을 다닌다는 게 사실은 전문 등반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진수의 등산 활동이 그리 탐탁지는 않았다. 방송에서 유명 산악인들의 사고 소식이 들릴 때마다 진수의 등산을 뜯어말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유는 단 한 번도 진수를 말리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지유도, 진수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얼마 전 시작한 사업 때문이라도 위험한 등산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이번에 들려온 소식은 진수의 해외 원정 등반팀의 조난 소식이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다행히 조난 소식이 들려온 지 하루 만에 구조 소식이 들려왔지만 일원 중 한 명은 실종 상태라고 했다. 이제는 남의 일 같지는 않은 등산가들의 조난 소식이 정작 진수의 일이 되어버리자 지유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불과 하루라고 하지만 조난 소식을 듣고 그 하루라는 시간 동안 지유는 평생을 살았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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