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구렁

돌배나무집 셋째 딸 Vol.23

by 루파고

불혹의 사십이 된 지유는 삶의 구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도는 삶이란 바로 지유의 생활을 두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버티고 버티다 계약 만료를 겨우 네 달을 앞두고 새로운 임차인이 나타났다. 사실상 투자금은 모두 증발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뭐라도 해야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았던 지유는 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사회에서의 이력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지유에게 조리사 자격증은 그녀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지유는 교회에서 만나 친자매처럼 지내던 언니를 통해 식당 주방일을 소개받았다. 처음엔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처럼 절박한 상황에 가까워지니 뭐라도 시켜만 준다면 잘할 수 있을 거라며 자신감을 북돋았다. 지유의 가늘었던 팔뚝은 날이 갈수록 두꺼워졌고 고왔던 피부도 거칠어졌다. 음식 솜씨가 좋고 꼼꼼한 성격 덕에 국가대표 합숙소 주방을 소개받았다. 말하자면 일종의 스카우트된 셈이다. 직장이 바뀌니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식당과 달리 주말은 꼬박꼬박 쉴 수 있고 평일에도 열 시쯤 출근해서 네 시경에 퇴근하면 되는 일이었다.

지유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중학교 2학년인 명수의 학업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별 사고 없이 건강하기만 자랄 것 같았던 진수와 명수의 생활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진수는 성적이 중상위권에서 더 이상 오르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그보다 명수가 걱정됐다. 지유는 아이들이 원하는 공부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모두 해주고 싶었다. 진수야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해왔으니 그다지 걱정할 것이 없었지만 명수는 딱히 잘하는 것도, 관심 있는 것도 없었다. 그동안 명수가 다녀보지 않은 학원은 없었다. 미술학원, 피아노 학원, 주산 학원, 태권도 학원 등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중 피아노 학원만큼은 아직까지 꾸준히 다니고 있었는데 좁은 집인 데다 여유가 없어서 집안에 피아노를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지유는 프랑스 유학이 깨진 이후로 아이들 교육만큼은 능력이 되는 한 모두 해주리라 마음을 먹었었다. 하지만 막상 가계 수입이 끊기고, 연이은 사업 실패와 보훈연금 상환 등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터지면서 지유가 꿈꿔왔던 삶 본연의 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지유는 그래도 뭔가 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을 때까지는 뭐라도 해보자며 마음을 잡아맸다. 지유는 하루는 날을 잡아 아이들을 불러 앉혔다. 진수에게 과외라도 시켜줄까 물었지만 진수는 명수에게 양보했다. 그렇지 않아도 두 아들 모두 과외를 시켜주는 건 사실상 무리였다. 명수는 과외보다 피아노를 원했지만 좁은 집에 피아노를 들여놓을 공간도 없었지만 피아노를 사줄 여력이 사실상 없었다. 지유는 마음이 무거웠다. 혹시나 했던 걱정이 불거진 것이다. ‘과외보다 피아노를 사 줘야 할까?’ 지유는 아쉽고 답답했다. 공부보다 음악에 관심이 많은 명수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중고 피아노를 사줄 수 있는 가능성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학업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지유는 최근 교회 언니에게서 바이올린 교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게 생각났다.

“명수는 바이올린 한번 배워볼래?”

“바이올린? 그거 비싸지 않아? 배우고는 싶은데~ 형 말처럼 돈이 많이 드는 거면 나 안 할래.”

“아니야! 엄마가 바이올린 정도는 사줄 수 있어. 일단은 조금 배워보고 정말 재미있으면 사줄게. 어때?”

“그렇다면 해 볼래.”

“그리고 형이 과외 안 할 거면, 명수 네가 과외 좀 받아야겠다. 놀지만 말고 공부 좀 열심히 하면 엄마가 정말 행복할 것 같아.”

그렇게 명수는 바이올린 교습과 과외를 독차지했다. 바이올린 교습을 시작한 지 한 달째 되던 날 지유는 한 달치 급여 정도 되는 거금을 들여 명수에게 새 바이올린을 사주고 말았다. 명수에게 바이올린을 건네주던 날 부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진수의 모습을 보았을 땐 가슴이 시렸다. 더 해주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었던 것이다.

겨울이 막 저물어버린 봄날의 일요일. 진수는 친구들을 만난다며 일찌감치 나가버렸고, 명수는 집에서 바이올린 연주에 한창이었다. 딩동 딩동~ 아파트 현관문 벨이 울렸다. 지유는 바로 앞 동에 사는 친하게 지내는 동생이 놀러 온 줄로 알았는데 상상해본 적도 없는 의외의 손님이 찾아왔다.

“정말,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확인도 없이 무턱대고 문을 열어버린 지유는 의외의 방문에 너무 놀란 나머지 황급히 문을 닫고 말았다. 난데없이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다. 아무리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죄송해요. 저~ 음~ 저기~ 일단은~”

지유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파트 현관 철문을 사이에 두고 지유는 문 밖의 상황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유는 당황스러운 나머지 더 이상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미안합니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튼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지유가 자신이 누구인지 차마 확인할 틈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유는 첫눈에 그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거의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지유가 그를 기억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훤칠한 키에, 흰 피부, 또렷한 인상이 쉽게 잊힐 만큼 평범하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단지 달라진 것이라면 나이가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그의 이마였다.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한 이마가 도드라져 보였지만 그다지 어색해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는 말끔히 다려 날이 선 해군 제복을 입고 있었다. 지유가 알아보지 못할 것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오래전 중위였던 그는 중령이 되었고 어깨 위의 견장은 꽤나 번쩍이고 있었다. 그는 지유를 짝사랑했던, 정미소와의 경쟁에서 무참히 패배했던 김선명이었다.

지유는 황급히 안방으로 들어가 옷을 골라 입으려 장롱 안을 뒤졌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비록 진해는 작은 도시에 불과했지만 처녀 적에는 패셔니스타로 유명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살이 부어올라 볼품없고 매력 떨어지는 중년의 아줌마가 된 걸 새삼 느낀 것이다. 게다가 장롱 안에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포장해서 보여줄 만한, 맘에 드는 옷 한 벌이 없었다. 한편으론 연락도 없이 무턱대고 집까지 찾아온 김선명에게도 짜증이 났다. 추억 속에서만 존재했던 그가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처럼 현재라는 시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고맙고 반갑기는 했다. 지유는 정신없이 널뛰는 생각을 붙잡으려 했지만 추억과 기억들은 스멀스멀 솟아오르더니 방금 터진 화산처럼 마구 살아났다.

분명 지유는 정미소를 사랑했었다. 아직도 그를 사랑하는 중이다. 그 사랑을 그 대신 두 아이에게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지유는 삶이 고되고 힘들 때마다 정미소를 만난 것을, 그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김선명을 선택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물론 잠시였지만 김선명을 떠올리곤 했던 것이다.

맘에 드는 옷을 골라 입고 호들갑을 떠는 동안 벌써 십여 분이 넘게 지나있었지만 현관문 밖의 김선명은 그저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밖에서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문을 열기 전 호흡을 가다듬은 지유는 살며시 문을 열고 김선명을 살펴보았다. 여자는 나이를 먹으면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남자들은 오히려 중년미가 넘친다고 들었는데 김선명 역시 예전보다 무게가 잡혀있어 보였다.

“거실이라고 하기엔 좁지만 저기 앉으세요.”

김선명을 거실로 안내한 지유는 빠른 걸음으로 주방으로 몸을 옮겼다. 이유 없이 냉장고를 열고 섰지만 시선에는 초점이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자신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커피 드릴까요?”

“네! 지유씨가 주시는 거라면 뭐든 괜찮습니다.”

김선명은 이십 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지만 예전과 비슷한 수준의 화법을 유지하고 있었다.

“커피가 맛이 있으려나 모르겠어요.”

“커피를 누가 커피 맛으로 마시나요? 함께 마시는 사람이 누구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많이 느셨네요. 연륜인가요? 많이 능글맞아지신 것 같아요. 그나저나 저희 집은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지유는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이 시점에 대체 그가 어떤 목적으로 온 것인지 궁금했다. 지유가 사는 집 주소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진해에 있는 부모님 댁은 그 자리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찾아와서 많이 놀라셨을 것 같습니다. 물론 당연히 그러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전 언젠가 꼭 지유씨를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지난겨울에 찾아오려고 했었지만 아무래도 봄에 오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봄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진해에서 지유씨와 만났던 그때와 비슷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왜?”

“지난해 상처하고 정신도 못 차리고 있을 때 우연히 동기 녀석을 통해서 지유씨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 상사가 인천에서 사고를 당했다고……”

김선명은 지유의 기분을 살피려는 눈치였다. 지유가 이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주었더니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괜찮으시죠? 정 상사 이야기가……?”

“괜찮아요. 벌써 십 년 가까이 된 이야긴데요.”

“지유씨는 모르시겠지만 저희는 지유씨를 차지하기 위해 결투까지 했었습니다. 물론 제가 졌습니다. 그땐 정 상사에게 패배를 인정하고 깨끗하게 포기했었습니다. 하지만 지유씨를 잊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약이라더니 오 년이 지났을 즈음에 저도 가까스로 지유씨를 잊을 수 있었고 끝내 결혼도 했습니다. 그 후 제 소식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시겠지만 지유씨와 결혼한 정 상사는 해외파견이나 출장을 멀리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오 년 동안 정 상사와는 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지유씨는 정말 잊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제겐 누구보다 깊고 애절한 첫사랑 이기도 했고 말입니다. 그때는 제가 참 재미도 없고 딱딱한 놈이었던 걸 알고 있습니다. 제가 워낙 숫기도 없는 데다 연애도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던 지라…… 모르긴 해도 만약 지금의 저였다면 절대 순순히 물러서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아무튼 지유씨를 이렇게 다시 찾은 이유는, 제 두 번째 인생을 지유씨와 함께 하고 싶어서입니다.”

“저기~ 저는요……”

지유가 말을 끊으려 하자 김선명은 지유의 말을 제지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지유씨! 잠시만 제 말을 마저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당장 어떤 대답을 들으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제 뜻을 전부 지유씨에게 전달하고 싶습니다. 제게는 두 딸이 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늦게 가지게 되어서 이제 열 살, 여섯 살입니다. 지유씨의 두 아들과는 나이 차이가 좀 있습니다. 제 아이들은 오빠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저 역시도 아이들이 많으면 제 아이처럼 다 키울 자신도 있고 각오도 하고 있습니다. 지유씨가 불편하시다면 저는 일 년이라도 기다리겠습니다. 절대로 제 아이들을 편애하지도 않겠습니다. 제가 지금은 벌써 머리가 벗어지기 시작은 했습니다만, 마음만은 아직 젊습니다. 지유씨! 다시 한번 제 프러포즈를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진급이 좀 빠른 편이라서 내년이면 대령이 됩니다. 비록, 많은 돈을 벌어다 드릴 수는 없겠지만, 지유씨를 행복하게 만들어 드릴 수는 있습니다. 저희 부모님께는 이미 말씀드렸고 허락도 받아놓았습니다. 지유씨 부모님께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지유씨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시더군요. 부모님 도움도 모두 거절하고 살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지난해 진해로 출장 간 김에 말씀드리게 되었고, 지유씨 주소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도 잘 되기를 바란다며 지유씨에게 제가 다녀갔다는 것을 비밀로 해주셨습니다. 지유씨! 이건 제 호출기 번호입니다. 오늘 제가 지유씨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전부입니다. 시간을 내어 주신다면 지유씨에게 마음을 얻어 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유는 그의 저돌적인 제안에 어이가 없었다.

“아직까지 저를 잊지 않으셨다는 게 너무 놀랐어요. 고마워요. 그런데 제가 지금 김선명씨 말씀에 좀~ 어지럽네요. 제가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유는 그의 갑작스러운 방문과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놀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지유씨 만나러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정말 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습니다. 봄이 오면 지유씨를 만나러 가자며 그렇게 다짐을 하고서도 그동안 이 동네를 네 번이나 찾아왔었습니다. 길에서라도 우연히 마주칠 수 있다면 좀 더 편하게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저도 지유씨에게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황당하시겠지만 충분히 고민하고 연락 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다시 저란 놈을 검증하고 싶으시다면 언제라도 불러주십시오. 저는 지유씨 구애를 위해서라면 불 속으로라도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김선명은 자신의 호출기 번호를 메모한 종이를 한 장 남기고 떠났다. 어찌 된 영문인지 지유는 그의 구애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그는 정미소와는 다른 색깔을 지닌 남자였다. 이십 년 전의 김선명이 소년이었다면, 지금의 그는 이제 청년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유는 고민 끝에 가깝게 지내는 언니, 친구, 동생들에게 이 사실을 공유했고 혼자 두 아들을 치워 가고 있는 지유의 모습을 안타까워했던 그들은 김선명의 구애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지유의 등을 떠밀어 댔다. 하지만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지유는 자신의 새엄마가 형제들에게 엄마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게 자기 일이 되지 않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새엄마는 절대로 친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 없었다. 새엄마의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노력이 있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 누구도 새엄마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유는 김선명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여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 한들 김선명의 아이들에게도 진수, 명수에게도 득이 될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안정적인 가정과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김선명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이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지유는 조심스럽게 진수와 명수를 앉혀 놓고 새아빠가 생기면 어떻겠냐며 물었다. 눈치 빠른 진수는 당연히 엄마도 엄마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며 전폭 찬성했고 명수 역시 엄마가 행복하면 찬성이라고 했다. 진수와는 달리 아직 어린 명수는 아빠의 빈자리가 누군가를 통해 채워진다는 기대감이 있는 듯했지만, 정작 찬성한다던 진수는 새로운 가정이 생긴다는 것에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게다가 시어머니는 몇 년 전부터 아직 젊은 나이니까 새로 좋은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게 낫지 않겠냐며 지유의 새 출발을 종용해왔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진수와 명수를 놔두고 가라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지유는 분신이나 다름없는 아이들을 놓고 가라는 것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고로 지유가 김선명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시어머니와의 전쟁은 불 보듯 뻔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아이들 뒷바라지는 명수의 대학 입학까지라고 나름의 삶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걸 깨고 싶지는 않았다. 지유는 누군가의 엄마로 살며 계속 살림이나 돈벌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벌이가 줄어들더라도 도시를 떠나 한적한 어촌에서 바다를 벗하며 살고 싶었던 것이다. 지유의 마지막 하나 남은 소망이었다. 그런데 김선명의 어린 딸들까지 다 키워내고 결혼시키고 나면 이십 년 이상 살림살이에 찌들어 살아야만 할 것 같았다. 지유는 누군가의 여자, 누군가의 엄마처럼 누군가의 존재가 아닌 지유 자신만의 인생을 살고자 하는 소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당장은 아이들의 엄마여야만 하기에 후회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하기로 했고 당장은 아무리 힘들어도 현실에서 도피할 생각은 없었다. 지유는 오랜 숙고 끝에 김선명의 프러포즈를 거절했다. 그러함에도 김선명은 세 번이나 더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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