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건 II

돌배나무집 셋째 딸 Vol.22

by 루파고

지유의 형제들과 홍명덕은 자존심 세고 의지가 강해 뭘 해도 다른 형제들보다 뛰어났던 지유가 눈에 밟혔다. 특히 홍명덕에겐 발악에 가까울 정도로 버티는 지유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가장 아끼던 딸이 홀로 되어 혼이 나가버릴 정도로 버텨내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끝내 허락했지만, 반대했던 결혼을 강행하고 집안의 도움도 거부하며 스스로 살림을 꾸려낸 지유였다. 형제들 모두 지유의 근성이 무너져 내릴까 걱정스러웠다.

정미소는 화장장을 하고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훈련된 군인들의 제식과 거룩한 분위기 속에 영면을 기리는 안장식이 진행되었고 정렬된 군인들의 묘비 끝에 정미소에 묘비가 세워졌다.

<몇 년, 몇 월, 몇 일, 정미소 상사는 이곳에 잠들다>라는 문구는 정미소의 사망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알리고 있었다. 진수와 명수는 비록 울고 있었지만 의젓했다. 한편 지유는 아이들의 모습에 이 녀석들을 믿고 살 수 있겠구나 싶어 자신감을 얻었다. 지유는 정미소가 남긴 소중한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 정미소의 묘비에 대고 중얼거렸다.

“여보! 우릴 지켜줘~ 지켜줄 거지?”

지유는 파란 하늘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국립묘지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엄숙한 음악은 지유의 마음을 숙연해지게 했다.




정미소가 세상을 떠난 지 삼 개월. 그 해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을 보낸 지유는 단독주택 전세계약을 조기에 파기하고 원래 살던 주공아파트로 들어가기로 했다. 다행히도 세입자와의 계약이 만료된 상황이었다. 홍명덕은 지유가 고향으로 내려오기를 원했지만 지유는 인천에 그대로 머물기로 했다. 또 홍명덕은 살림에 보태고자 했지만 지유는 그것 또한 받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지유가 아직 젊고 하니, 아이들을 주고 새로 시집을 가도 된다고 했다. 지유는 시어머니의 말도 되지 않는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 지유는 시어머니가 자신과 아이들을 갈라놓으려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끔씩 정미소의 부대장과 동료들이 과일이며 금일봉이며 가지고 들렀다. 그들은 지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금일봉을 놓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가깝게 지내던 동료 몇몇은 진수와 명수를 목욕탕에 데려가기도 했다. 다른 것들은 지유가 다 해줄 수 있었지만 그 또래의 남자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아빠의 빈자리만큼은 지유가 해낼 수 없었기에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주공아파트로 이사하고 얼마 후, 서울에서 공부하던 여섯째이자 첫째 남동생 지행이 작은 방에서 지내기로 했다. 지행이 있으면 지유가 해줄 수 없었던 부분을 그나마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홍명덕은 자존심이 강한 지유가 집안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자, 지행의 하숙비 조로 생활비를 보태주는 방법을 동원했던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니 지유가 홍명덕의 도움을 조금이라도 수용할 수 있었다. 사실 지유 역시 도움이 필요하기는 했다. 그동안 한 푼, 두 푼 모아놓은 돈이 있긴 했지만 정미소의 연금으로는 저축도 할 수 없었다. 커가는 두 아들을 기우며 살기엔 돈이 턱없이 모자랄 것이고 미래는 점점 불투명하게 느껴져 한숨이 늘고 있던 차였다.

지유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정미소가 마지막 의식이 돌아왔을 때, 옆에서 기도했던 목사의 집요한 전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그가 남긴 유언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목사는 지유에게 남편이 사망을 앞두고 하나님을 섬겼으니 영생을 얻었으니 지유도 하나님을 섬겨야만 그가 영생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목사의 설명에 지유는 교회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진수, 명수도 함께였다. 그러나 진수는 교회를 거부했다. 그렇게 빌고 빌었는데 아빠를 데려갔기 때문에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사실 지유도 다르지 않았다. 지유는 어린 시절 엄마를 데려다주겠다던 목사의 거짓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의 지유는 오로지 정미소의 영생을 위해서 교회를 다니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군인가족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을 알게 됐다. 진수가 국민학교 6학년이 되던 해에는 교회 신도의 동업 제안을 받았다. 수예점을 공동으로 운영하자는 꼬임에 아껴 모았던 돈을 날리고 말았다. 지유에게 장사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가 임대보증금과 매달 나가는 임대료가 아까워서 버티고 버텼지만 끝내 큰 손해를 봤다. 지유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과 일시불로 받았던 국민연금을 거의 날려 버리고 말았다. 막막하기만 했다.


살면 살아진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살기 위해 살다 보니 세월은 유속을 느낄 수 없는 거친 계곡처럼 흐르고 흘렀다. 지행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때문에 지유의 집을 떠났다. 다달이 들어오던 하숙비도 이제는 완전히 끊어졌다. 지행이 떠났어도 홍명덕은 하숙비를 계속 송금했지만 이번에도 지유는 거절하고 말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지만 스스로 만든 틀 속에 갇혀 부모형제의 도움을 뿌리친 것이다. 사실 지유는 홍명덕의 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녀 자신을 설득할 구실이 없었던 것이다.

불과 몇 개월 만에 막막한 생활이 시작됐다. 지유는 이제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서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지유는 얼마 남지 않은 돈을 투자해 근처 아파트 상가에 소질을 살려 여성 액세서리와 수예점을 열었다. 이번에는 혼자였다. 유동 인구가 별로 없는 세 평 남짓의 허름한 상가였다. 가진 돈이 얼마 없었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크지 않았다. 이제 돈만 잘 벌리면 그만이었다. 성공은 아니어도 먹고사는 데는 지장은 없으리라는 낙천적인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몇 달을 채 버티지 못했다. 벌이는 시원치 않았고 월세를 내는 것도 벅찬 상황이 지속되었다. 빨리 접는 게 남는 거라고 생각한 지유는 모든 재고를 염가로 정리했다. 세일을 해서 판다고 써 붙이니 그야말로 불티 나게 팔렸다. 남는 게 없는 게 안타까웠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문제는 물건을 거의 다 팔아버렸음에도 새로운 임차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월세와 관리비만 내고 비워둬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지유는 계속된 실패로 절망했다. 두려웠다. 무엇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정말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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