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5박6일체류기-5, 마지막
제주여행 나흘째가 되어서야 하나 깨달았다. 우리가 아직 바다를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비행기 타고 멀리까지 와서 투표도 하고, 뽀로로도 보고, 귤도 땄지만 정작 제일 중요한 일은 하지 않은 것이었다.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있었다. 재하가 바다 보고 싶다 하여 시작된 여행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 이야기를 아내에게 하자 그녀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쪽은 더 생각 못했나 보다, 그래도 내가 낫구나’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내 아내가 외쳤다.
「나 아직 친구들 못 만났어!!」
그리고서는 후다닥 단톡방을 파고 연락을 하더니 자기 괸당(?)을 만나러 간다며 총총총 사라졌다. 순간 일어난 일이라 뭐라 말할 새도 없었다.
당연히 재하는 재워놓고 나갔다. 어제와 그제 모두 일찍 잠든 다음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 깨지 않았기에 그날도 그럴 거라 여겼다. 세상 너그러운 남편 행세와 함께 내일 와도 된다는 카톡까지 여유 있는 척하며 보내 놨다. 말로는 아내가 너무 빨리 사라져서 미처 하지 못했다. 두렵긴 했다. 혹시 깬다면 얼마나 울고 불고 난리를 칠까. ‘설마 죽기야 하겠어...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딸 옆에 누워 폰을 가지고 놀았다. 아내는 오래간만에 괸당들을 만나 흥분했는지 와인 뚜껑을 젓가락으로 뽑아버리는 차력쇼를 했다고 했다. 자기에게 일찍 들어오지 말라 하는 무력시위 같기도 했다.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잠결에 재하 울음소리가 들렸다. 재하가 어느새 일어나 앉은 채 울고 있었다.
「엄마... 엄마...」
눈물이 크고 실해 달빛이 비쳤다. 올 것이 왔다 싶었다. 꿈을 꾸다 갑자기 현실로 끄집어 올려져 정신은 없었다. 일단 안은 다음 불을 켰다. 실수로 전체 불을 켰다. 환해지면 잠이 깨버릴까 봐 다시 허둥지둥 독서등만 켰다. 재하는 엄마가 볼일 보러 간 줄 알고 화장실로 가자 했다.
「아니야, 거기 가도 엄마는 없어」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받은 문자인 「나 내일 들어갈게」를 보여줄 수도 없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찌어찌 얼러서 재웠다. 당장 카톡을 보내 현장 상황을 알리고 싶었지만 쿨 한 남편 흉내를 내놨기 때문에 자존심도 상하고 민망하기도 하여 차마 보낼 수 없었다. 그래도 일단 잠이 들었으니 내일까지는 괜찮겠지 싶었다. 정확히 십 분 후에 또 깼다.
「엄마... 엄마...」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독서등은 끄지 않았었다. 눈물이 불빛에 비쳐 번쩍번쩍 하니 눈이 부셨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아내에게 연락이 왔다. 자기 택시 잡았다고, 이제 간다고. 흥분해서 나도 모르게 「째!! 엄마 온대!!」라고 소리를 쳤다. 아빠 품에서 선잠이 들었던 딸은 ‘엄마’ 소리를 듣고 깨서 다시 울었다.
「엄마... 엄마...」
그렇게 엄마가 좋을까. 나는 엄마 옆에서 자라고 하면 기분이 안 좋아질 것 같은데. 그래도 새벽 두 시 서귀포 차량답게 아내가 탄 택시는 낮게 비행을 해서 15km를 10분 만에 날아왔다. 어찌 되었건 아내가 너무너무 반가워 재하를 던지고 내 침대로 건너와 잠을 잤다.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 아내에게 왜 조기 귀가했냐고 물었다.
「애들이 나이 들어서 한시 넘어가니 다 뻗더라고. 거기서 자느니 재하랑 같이 자려고 왔지」
우리는 오늘은 반드시 바다를 가자했다. 오전에는 키티 박물관을 가고 오후에 해변으로 가기로 했다. 아내의 해장을 위해 근처에 있는 설렁탕 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아침으로 늘 파스타를 드시는 딸을 위해 조선 파스타인 소면을 추가 주문했다. 꼬맹이는 먹던 것과 다르다며 소면은 먹지 않고 고기만 잘라먹었다. 결국 내가 다 먹었다. 사장님 인심이 후해 코로 면이 삐져나올 것 같았다. 키티 박물관은 평화로 길가에 있다. 여기는 어떤 사진 한 장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곳이기도 했다. 2018년인가 제주 살 때 ‘솔릭’이라는 태풍이 왔었다. 그때 걔가 박물관 앞의 대형 키티를 습격해 목을 꺾어놓았었는데 그 참혹한 사진이 공개돼 인터넷을 돌며 유명해진 것이다. 이 태풍은 다른 것으로도 이름이 높은데 바로 설레발이다. 솔릭이 올 때 이놈이 우리를 멸망시키러 올 것이라고 바람 불기 사흘 전부터 온 매체가 다 ‘솔릭’으로 도배되었었다. 지구 종말의 날이 온 것처럼 정부는 위험하다며 집에 들어가라는 문자를 하루에 다섯 개씩 뿌렸다. 하지만 태풍은 예측대로 가지 않았다. 경로를 지 마음대로 바꿔 수도권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고 지나갔다. 물론 위에 얘기했지만 그냥 가지는 않았다. 대한민국을 박살 내지는 못했지만 제주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전리품으로 키티의 목을, 정부에서는 기상청장님의 목을 가지고 떠났다. 한편 제주에서 태풍은 일상이기도 해서 생각보다 사람들이 별 신경을 안 쓰기도 한다. 제주에 오래 살았던 아내는 비바람에 창문이 부서질 것 같아 내가 덜덜 떨고 있을 때도 쿨쿨 잘 잤다. 제주는 한반도 쪽으로 오는 모든 태풍에게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태풍이 한반도에 상륙하기 전 제주도가 힘을 많이 빼놓기 때문에 육지에 별 문제가 생기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도 살아보고야 알았다. 그러니 ‘태풍 설레발치더니 별거 아니네’라고 할 것이 아니고 누군가 너 대신 제주에서 물벼락, 바람 폭탄은 맞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제주는 늘 최일선에서 태풍과 맞서 싸우고 있다.
아내는 키티를 좋아했다. 키티로 도배된 신발도 갖고 있다. 함께 살게 된 이후부터 그 신발은 늘 내 살생부 첫 번째에 올라 있었다. 왠지 꼴 보기 싫었다. 그러나 늘 아내의 비호로 살아남았다. 이사하며 신발장 적폐 청산을 하려고 했었지만 아내는 작은언니가 사 준거라며 키티 신발을 결사옹위했고 결국 여직까지 신발장에 잘 살아남아있다. 그리고 이제는 자가 증식하고 있는 재하 장난감 상대하기도 벅차 키티 신발 상대할 여력이 없어졌다. 그런 거 보면 살아남는 자가 승자인 것 같기도 하다. 키티 박물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키티였다. 옷 입는 키티, 밥하는 키티, 화장하는 키티, 우주 가는 키티들이 넘쳐났다. 이 고양이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와서 본다면 환장할 것 같았지만 아직 일제 좋은 줄 모르는 우리 애국자 딸은 뽀로로를 더 좋아해서인지 시큰둥했다. 아무래도 여기 코스는 아내의 사심인 듯했다. 재하는 키티보다 휴게실에 있는 그물 놀이기구를 더 좋아했다. 놀다 요기나 좀 할까 하여 키티 구내식당에 들어갔다. 재하는 그제야 관심을 보이며 초코 케이크를 먹고 싶다 했다. 가격이 아주 비싸지는 않았다. 다만 우리는 조금 이따 호텔에 가서 점심 뷔페 먹을 거였다. 정확히 말하면 난 스테이크 먹으러 갈 것이었다. 어젯밤부터 벼르고 있었다. 유튜브로 나이프 쓰는 법도 여러 개 봤다. 내 스테이크를 방해하는 어떤 행위도 용납할 수 없었다. 분명 이재하는 두 숟가락만 먹을 것이고, 나머지는 내가 돈 아깝다며 주워 먹어 스테이크를 두 접시밖에 못 먹게 될 거였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호텔에도 초코 케이크가 있을 것이며 혹 말단 주방장이 만들었어도 박물관 케이크보다는 맛있을 거였다.
일단 재하를 구슬려 밖으로 나왔다. 시간이 오전 11시, 어중간했다. 그때 아내가 나를 유혹했다.
「우리 이시돌 목장 갈까?」
이시돌 목장은 아일랜드 출신 제임스 맥그린치 신부님(Patrick James McGlinchey, 한국명 : 임피제, 1928~2018)이 만든 목장이다. 그분은 1954년 제주에 부임하셨는데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섬을 보고 역시 늘 힘들었던 자신의 고향을 떠올렸다고 한다. 대학에서 수의학을 전공했던 그는 아일랜드에서 요크셔 돼지를 데리고 와 축산업을 보급한다. 그리고 가톨릭에서 농부를 수호하는 성인 이시도르(St. Isidore)의 이름을 따서 이시돌 목장을 만든다. 이곳에서부터 제주 흑돼지 전설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전에 다른 글에서 한 번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즐기는 제주 흑돼지는 토종 ‘꺼멍도새기’들은 아니다. 이 요크셔 종과 교잡된 개량종이다. 원래 꺼멍도새기들은 축산진흥원에 잘 계신다. 원조의 맛이 궁금할 수 있겠지만 꺼멍도새기는 천연기념물이다. 식사 한 번에 5천만 원을 태울 수는 없으니 그냥 남들 먹는 걸로 먹어야겠다. 아무튼 이것이 이시돌 목장의 연원이지만 사실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이스크림 때문이다. 이시돌 목장에는 「우유부단」이라는 카페가 있는데 여기서 파는 밀크 아이스크림은 정말 맛있다. 제주 살았을 때 그렇게 돌아다니기 싫어하는 나였지만 아내가 이시돌 목장 가서 아이스크림 먹자고 하면 「이시돌? 아이스크림!!」하면서 뛰어 나갔었다. 함께 파는 밀크 티도, 우유도 괜찮아 종종 사 와서 먹었었다. 유통기한이 짧아서 대개 그날 다 먹었다.
우리는 이시돌 목장에 도착해서 아이스크림 두 개를 경건하게 주문했다. 하나면 둘이 먹을 수 있는 나름 충분한 양이지만 오래간만에 왔으니 양껏 먹고도 싶었고, 재하가 왠지 많이 먹을 것 같다는 성스러운 계시가 온 것도 같았다. 역병 때문에 매장 안에서 취식할 수는 없었다. 밖에 작은 비닐하우스를 여러 개 세워놓아 거기서 먹으면 되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룰루랄라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데 재하 눈빛이 무언가 싸늘했다. 「내 초코 케이크는 안 사주더니 아이스크림은 잘 들어가나 보네?」 약간 이런 뉘앙스였다. 할 말이 없었다. 너도 먹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하며 재하에게 줘봤지만 몇 숟가락 먹고 말았다. 계속 나가 뛰겠다고만 했다. 아내가 먹다 말고 쫓아 나가자 나는 그것도 마저 먹었다. 한 개 반을 먹자 비로소 스테이크 생각이 나서 온 몸이 싸늘해졌다.
점심을 좀 늦게 먹자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침도 제대로 먹지 않고 초콜릿 케이크도 먹지 못한 재하가 배고파했다. 어쩔 수 없이 호텔에 오자마자 식당으로 갔다. 재하는 예상대로 파스타를 먹고 우리 부부는 예정대로 스테이크만 파기 시작했다. 어제 몇 점 먹은 것과 맛이 달랐다. 아무래도 아까 아이스크림을 과하게 먹은 부작용인 것 같았다. 바람과는 다르게 별 맛이 없었지만 스테이크는 마음으로 먹는 거라고 생각하며 몇 접시 꾸역꾸역 더 먹었다. 아이스크림 반 개 만 먹은 아내는 배부르다며 두 접시 먹고 말았다. 저것이 문명인이구나 싶었다. 나는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먹을 것에 집착했지... 다 육아 탓이야... 사람이 원초적이 됐어」라고 중얼거리며 미련한 짓인 걸 알았지만 입소하기 전 장정처럼 소고기를 밀어 넣었다.
일단 방에 들어왔다. 머리가 좀 아팠다. 아무래도 잘못 먹은 것 같이 후회가 되었다. 어릴 때는 나이 먹으면 멍청한 짓 안 할 줄 알았는데 불혹이 되어도 변한 게 없었다. 고기 많이 먹고 싶어서 체하다니 부끄러워서 어디 말할 수도 없었다. 바다를 안 갈 수는 없었다. 내일은 떠나는 날이었다. 아내와 어디를 갈까 이야기했다.
「어디로 갈까? 어디가 나을랑가」
「어디가 예쁘지? 그냥 중문해변으로 갈까?」
「거기는 그냥 맹숭맹숭하잖아. 재하 첫 바다인데 인상에 팍 남을 데가 없나?」
「좋기는 협재가 좋은데 거긴 너무 멀잖아」
「글치. 저번에 누가 쇠소깍 예쁘다고 하지 않았나? 근데 거긴 바다도 아니고 강도 아닌 것이...」
「그냥 중문으로 가자. 그게 그거야」
굉장히 생산적인 토론 끝에 그냥 호텔 앞에 있는 중문색달해변으로 가기로 했다. 프런트에 전화해서 중문해변으로 걸어가는 게 나은지 차를 타고 가는 게 나은지 물어봤다. 아이가 있으면 걸어가기는 애매하다고 했다. 그래서 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우리가 제주시에 있었으면 별 고민 없이 딱 용두암 보여주는 건대 란 농담을 했다. 제주 하면 용두암 아닌가. 제주 한 번 안 가본 사람도 용두암은 모두 아니까 말이다. 다만 정작 제주 사람들 중에는 거기 한 번도 안 가본 사람들도 있었다. 정말 예전 이야기지만 비수도권 사람들은 서울 사는 사람들이 모두 63 빌딩 가 본 줄 아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았다. 내가 대학 들어갔을 적(무려 20 년 전... 하...)에는 지금과 다르게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이 학교에 많았다. 그 친구들은 서울 산다고 하면 대뜸 63 빌딩 가봤냐고 물어봤다. 안 가봤다고 하면 어떻게 서울에서 63 빌딩을 안 가볼 수 있냐고 반문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63 빌딩은커녕 남산타워도 가보지 못했다. 아내에게 물어봤다.
「자기는 63 빌딩이나 남산타워 가봤어?」
「남산타워는 몇 번 가봤지」
걸렸다.
「언 넘 이랑? 여러 명이랑 갔구만」
「....」
「자물쇠도 걸었어? 몇 개나 거셨나?」
「... 거기 자물쇠 주기적으로 철거하니 내 건 진즉에 없어졌을 거야」
더 이상 물어봤다간 아내가 내 입에 자물쇠를 채울 것 같아 그만뒀다.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았다. 지나가는 이야기 하나 하면 용두암 앞 스타벅스에는 외지인들이 득시글거리지만 거기에서 2km 정도 떨어진 용담 해변 스타벅스에는 원주민들이 많이 간다. 거기서 소개팅 많이들 한다. 예전에 예식장이었던 곳을 개조해서 만든 곳이라 성사율이 높은가 싶다. 그곳 옆에 있었던 「닐모리동동」 이란 카페가 스타벅스와 더불어 소개팅 양대 산맥이었다고 하는데 이곳은 지금 없어진 듯하다.
재하는 해변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많은 걸 보고 바로 안아 달라고 했다. ‘혼자 커서 그런지 아직도 낯을 많이 가리나 어린이집을 다녀서 나아지긴 했는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냥 걷기 귀찮아서 그런가 싶었다. 안기에 허리가 아파 목말을 태웠다. 바다 옆에 가 멀리서부터 파도 소리가 들리면 「쟤!! 저게 파도 소리야」 이런 말을 해주는 상상을 했었는데 카페에서 나오는 시스타 노래가 너무 시끄러워 바닷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3월부터 Touch my body라니. 하기는 여기 중문해변은 파도 타는 서퍼들이 많아 늘 뜨겁다. 딸을 어깨에 얹고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사람들이 은근히 있었다. 초봄부터 파도 타는 열정적인 사람들도 꽤 되었다. 중문해변은 파도가 높아서 서핑하기 좋은 곳이라고 한다나. 그 사람들은 사시사철 물속에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원래 중문에서 제일 바다 보기 좋은 호텔은 지금은 없어진 하얏트 호텔이었다. 이곳에는 「쉬리의 언덕」을 비롯해서 객실 대부분이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다만 창문을 열어 놓는다면 중대한 단점이 하나 생긴다. 파도 타는 사람들 즐거워하는 아우성이 새벽부터 들린다. 밤에도 멈추지 않는다. 시험 합격했던 기념으로 아내와 놀러 왔었는데 파도 소리 들으러 와서 「꺄아악」하는 비명만 열심히 듣고 갔다. 한동안 환청도 얻어갔다. 바이킹 놀이기구 옆에서 잠을 자는 것과 비슷했던 것 같기도 했다. 이번 여름부터 GS에서 다시 인수해 개관한다고 하는데 참고들 하시기를. 그 호텔 바다 뷰는 정말 끝내주긴 한다.
해변에 오니 신드바드 이야기에 나오는 ‘바다의 노인’처럼 내 목을 감싸고 있던 재하가 내려왔다. 어찌나 목을 강하게 잡았는지 컥 소리가 났다. 재하는 처음 보는 큰 물을 열심히 바라보다 바다를 향해 모래를 밟으며 천천히 걸었다. 그 뒷모습에 뭔가 울컥했다. 다들 아이가 바다 바라보는 뒷모습을 많이 찍는 것을 보고 왜 그런가 했더니 나도 그러고 있었다. 지금이 재하가 처음 보는 대자연의 모습이려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사실 아빠는 요새 자연보다 자식이 더 신기한데. 어떻게 네가 아빠 엄마에게 왔는지, 날 얼마나 봤다고 뭘 믿고 이렇게 까부는지,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어찌 저리 말을 안 듣고 ‘싫어’부터 하는지, 여러 가지가 신기하고 궁금했다. 난 상념에 젖었고 재하는 커서 순례자가 될 건지 모래사장을 한참 배회했다. 시간이 지나 걸을 만큼 걸었는지 재하가 돌아왔다.
「재하야 이게 바다야. 잘 봤어? 신기해?」
「물!!!」
「... 아니, 저건 바다라고 하는 거야. 바다!!」
「무울!!!!」
부모 말 안 듣는 건 dna에 있나 싶었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점심 먹은 게 얹혀서 속이 안 좋아 저녁은 굶었다. 다른 사람들도 별생각 없어 보였다. 그냥 쉬려고 했는데 다음날 비행기를 탈 생각에 걱정이 마구 되었다. 이재하가 얼마나 또 난리를 칠 것인가. 만화라도 보여주면 잠잠할까 싶어 유튜브 프리미엄에 가입해 뽀로로랑 콩순이 동영상 몇 개를 저장했다.
날이 바뀌었다. 어제 과식한 죄로 호텔 조식에서 북엇국만 먹었다. 그걸로 벌은 충분히 받은 것 같았다. 정리를 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올 때 짐이 많아 기저귀 없어지면 적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관계자들에게 줄 선물이 들어가니 가방이 더 빵빵해져 버렸다. 가는 길에 「모리노아루요」에 들러 덮밥을 먹었다. 이곳은 마스터셰프코리아 1회 우승자 김승민 셰프가 하는 곳이었다. 그분은 주방에서 조리를 하고 계셨다. 제주 살 때 몇 번 왔지만 계속 출타 중이셨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여행 와서야 처음 봤다. 카이센동이 왠지 더 맛있었다. 시간이 약간 남아 애월 곽지 해변에 갔다. 내가 제주 바닷가에서 제일 좋아하던 곳이었다. 여기에는 충청북도해양교육원이 있어서 직장 다닐 때 출장 자주 왔었다. 주변에 「몬스터살롱」이라고 츄러스 맛있는 집이 있어 가는 길에 사서 직원들과 나눠먹기도 했었다. 비취색 바다는 여전히 예뻤다. 나그네 입장에서 보니 더 좋아 보였다. 재하는 어제 가봤다고 익숙한 듯 모래사장을 걷다가 바닷물 속에도 발을 넣었다.
「재하, 이게 뭐라고?」
「물!!!」
「바다라니까!!!」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탔다. 긴장하고 탑승했건만 재하는 비행기를 타자마자 잠이 들어 착륙하고서야 깼다. 딸이 제주에서 행했던 수많은 악행들은 이걸로 덮어주기로 했다. 자식은 수많은 잘못을 해도 한 번에 용서받을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부모는 수많은 희생에도 한 번 실수로 욕을 먹으니 내가 잘못하면 아빠를 쥐 잡듯이 잡겠지. 그게 자연의 섭리니 어쩔 수는 없다. 이렇게 우리의 제주여행은 막을 내렸다. 아, 오는 비행기가 조용하지는 않았다. 아기들 눈물총량의 법칙이 있는지 재하가 울지 않으니 다른 애가 울었다.
p.s : 그동안 제주체류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길어졌네요 아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