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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Jun 07. 2022

언니병 환자

과묵한 그녀가 입을 열다

우리 딸은 32개월이 지났지만 말을 잘하지 못한다. 단어를 다 말하진 못해도 앞글자씩 이나마 이어가며 문장을 만들어 보려고는 한다. 그게 대견해 「우리 재하가 세상에서 제일 말 잘해」라고 마구 칭찬해 주었었다. 자신감이 붙었는지 어린이집으로 가 친구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시간에 당당하게 나갔다고 했다. 의기양양하게 나갔건만 앞글자만 말하는 걸 애들이 알아들을 리 없었다. 냉정한 또래들의 싸늘한 평가에 마음의 상처를 받았는지 다시 과묵한 아이로 돌아갔다고 담임선생님이 재하를 토닥거리며 이야기해주셨다.     



사실 아주 심각한 건 아니다. 나와 아내가 말이 워낙 빨랐었기에 주변에서 다들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나는 돌 전에 이미 유창하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가 40년째 천재로 오해하고 있다. 아내도 집이 가게를 하기도 했고 언니도 둘이나 있어 조숙한 한국어 실력을 가졌다고 했다. 이에 반해 우리 딸은 앞글자 하나씩만 말하면 애비가 매크로처럼 움직여서 그런지 좀처럼 입이 확 열리지 않는다.      



다행인 것이 있다면 할 말은 한다는 것이다. 유아종합검진 때 자주 가는 소아과 선생님이 재하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 늦는 건 맞다고 하시며 한 말씀하셨다.

「무엇보다 책을 많이 읽는 게 중요해요. 재하, 오늘부터 하루에 책 세 권씩 읽는 거야」

그동안 선생님의 권면을 조용히 듣고 있던 재하가 대꾸했다.

「쟤!! 책 시여!!」

네 살짜리의 반지성 선언에 선생님은 당황하셨지만 「요새는 디지털 세대지요」하면서 훈훈하게 마무리 지으셨다.     



그래도 요새 재하의 입을 열게 하는 마법의 단어가 있으니 바로 「언니」이다. 어린이집에 동생들이 들어오면서 선생님께 배운 모양이었다. 혹여 누가 「아가」라고 부르면 발끈하면서 「쟤 아가 아니, 쟤 언니!!」 하면서 반격한다. 「예쁜아」, 「딸」, 「우리 강아지」 이런 말에도 여지없다. 덩달아 이런저런 말로 자기가 언니라는 걸 증명해보려고 하니 언니라는 말을 달고 사는 게 약간 아기꼰대 같아도 보기는 좋다. 다만 이제 만 나이 제도가 정착되고 그러면 나이 따지는 문화도 예전 같지 않을 텐데 서열정리 끝물에 태어난 우리 딸은 어쩌나 싶기도 하다. 좀 일찍 태어나지 그랬니 딸아. 아니 언니.


마이크를 내 몸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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