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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Oct 14. 2021

결혼기념일에는 수육을

결혼기념일을 기념하며

아내가 휴가였던 어느 날 우리가 종종 가는 국밥집에 갔다. 늘 먹던 대로 소고기 국밥 두 개를 시켰다. 몰랐는데 내 등 뒤에 남녀 쌍쌍으로 넷이 있었나 보더라. 아내가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그 건너 커플들만 바라봤다. 의아했지만 따뜻한 내 선지가 더 중요했다. 식기 전에 먹으려고 가열차게 수저질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나지막이 한마디 건넸다.

「자기야, 저 사람들 수육 먹어」

「....」

말을 이어나갔다.

「저 남자, 저 여자 좋아하나 봐. 수육도 시켜주고 말이야」

「... 사심 없는 소고기는 없어. 아주 엉큼한 놈들인 거야」

「아니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그냥도 아니고 양념이랑 반반으로 시켰어. 맛있겠다」

「... 내가 자기에게 사심이 없어서 국밥만 시킨 거구나. 미안, 다음에는 꼭 수육이랑 같이 먹자」  


   



딸이 태어난 지 2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현실은 불벼락이다. 아침마다 「소녀, 집을 떠날 수 없사옵니다」를 외치며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는 신파극을 찍는다. 점심 먹고 돌아와서는 짐승 같은 체력으로 잠시도 쉬지 않고 돌아다닌다. 가끔 자는 날이 신기해질 정도이다. 혹시 잔다면 어디 아픈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밤에 일찍 자느냐? 그렇지 않다. 「캬하하」 웃으며 지옥의 카니발을 벌인다. 신제품이라 그런지 눈도 좋아 바닥의 장애물도 잘 피해서 컴컴한 거실을 빠르게 돌아다닌다. 그거 쫓아가다가 떨어진 장난감 밟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참을 수 없어 「재하, 안 자니?↗」하고 언성을 아주 약간 올렸다가는 뒷감당이 어렵다. 노는데 방해했다고 혹시 삐치면 그때부터 나랑 눈도 마주치지 않을뿐더러 다음날 어린이집도 가지 않겠다며 행패를 부릴 것이기에 그렇다. 기억력이 비상해 뒤끝이 끝내준다. 이런 상황이니 사심의 ‘ㅅ’ 자도 생기기 어렵다.        



우리 딸은 어린이집을 제시간에 가주는 매너도 낮잠을 자주는 양심도 없지만 솔직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잘 살펴보면 우리 부부 모두의 모습이 담겨 있다. 잠 안 자고 노는 것은 엄마를 닮았다. 큰 처형께서 증언하시기를 놀고 싶어 잠 안 잤던 것이 재하 엄마의 본모습이라고 했다. 그뿐이 아니다. 자극적으로 놀고 싶어 하는 것도 엄마를 닮아버렸다.

「오늘 재하가 놀이터에서 그네 타다 뛰어내렸어!!!」

「그래? 사실 내가 그랬는데. 그네는 뛰어내리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지」

「... 너무 훌륭한 유전자를 물려준 탓에 이제 대대손손 그네에서 뛰어내리겠다...」

물려줄 게 없어서 위험애호유전자를 물려주냐고 내가 비난을 하자 아내는 반격을 했다.

「뭐래. 재하 삐치는 거 보면 지 아빠랑 아주 똑같더만」

맞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삐치고 뒤끝 있는 것은 아빠를 빼다 박았다. 나는 잊지도 않고 용서도 안 하는데 벌써부터 재하도 그럴 기미가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딸이 처음 어린이집에 가던 날 한 친구 하나가 재하의 머리핀을 가져간 적이 있었다. 6개월이 지난 지금도 시간 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한다. 하여튼 저 조그만 체구에 아빠와 엄마의 안 좋은 것들이 모두 들어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뛰어내리기 1분 전



다행히 나는 혼자가 아니고 아내가 있다. 엊그제도 재하는 사는 게 즐겁다며 자지 않고 야간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졸려 눈물범벅이 된 채 재하에게 자자고 사정했다. 그렇지만 딸내미를 말리지 못하고 바로 까인 채 장탄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하 엄마는 취침거부 유경험자라 그런지 의연했다. 아내는 내게 낮지만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자. 내가 30분 안에 재울게」

그 말이 그렇게 폼 날 수가. 그리고 약속을 지켰다. 쥬니버 자장가가 두 바퀴 돌기 전에 재하를 재웠다. 약속을 지키는 멋진 여자 이정옥. 침착했던 그녀의 호언장담은 술이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가지고 돌아오겠다던 삼국지의 관운장을 생각나게 했다. 이렇게 든든한 아내가 있어 이재하의 경우 없음을 견디게 해 준다. 연애할 때와 다르게 몸도 나날이 듬직해져서 살짝 문제긴 하지만 늘 마음은 훈훈하다.    


늘 훈훈하게 삽시다



지난번에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는 한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야, 애 낳으면 못하는 게 많아지냐?」

「... 못하는 게 많아지는 게 아니고 할 수 있는 게 몇 개 없어」

그 할 수 있었던 일들 중 맨 첫 번째로 잘려나간 건 우리 부부만의 일이었다. 재하가 있으니 늘 아이가 우선이고 우리는 뒷전이 되었다. 그게 딱히 나쁘지는 않다. 자식 키우는 것은 그만큼 보람 있고 얻는 것도 많으니까. 그래도 가끔은 재하 나오기 전에 둘이 자유롭게 지냈던 것도 종종 떠오른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우리의 네 번째 결혼기념일이다. 예전처럼 좋은 데서 맛있는 걸 먹을 수는 없겠지만 내가 아직 당신에게 관심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날은 꼭 수육을 먹어야지. 사심을 가득 담아 반반으로 사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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