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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Mar 02. 2021

아내와 기념일

만난 지 4주년을 기념하며

예전에 아내를 보고 싶다고 글을 썼더니 구독자 수가 많이 늘었다. 아내는 의기양양하게 「거 봐라. 내 이야기 쓰면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앞으로 더 많이 써라. 제목에도 나를 집어넣어라」라며 으스댔다. 그도 그렇고 우리가 벌써 만난 지 4주년이 되었으니 그거에 대해 써 봐야겠다.


며칠 전, 2월 28일은 우리가 만난 지 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뭐라도 사기 위해 재하를 유모차에 태우고 백화점에 갔다. 사실 아내는 화장품을 잘 쓰지 않기 때문에 선물 고를 때마다 어렵다. 사줘봤자 잘 쓰지도 않는다. 지난번 결혼기념일에 사 준 신상 립스틱은 어디 갔는지 간데없고 껍질만 가방 속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사탕 껍질 하고 사이좋게 같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나마 쓰는 수분크림을 사려고 한 매장에 들어갔다. 점원에게 문의하려는데 갑자기 재하가 「압바~압바~」 급하게 불렀다. 아빠가 다른 여자와 이야기하니 격렬하게 자신을 안으라고 했다. 계산을 할 때도 알 수 없는 말로 대화를 방해했다. 평소에 엄마에게 무슨 교육을 받았는지 궁금해졌다. 엄마는 지금 20개월째 결혼반지도 끼지 않고 다닌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저녁때 아내에게 4주년 기념 선물이라며 포장을 내밀었다. 아내는 살짝 당황했다. 「아니 난 준비도 못했는데...」. 잠시 고민하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표정으로 말했다. 「내 선물은 작년에 샀던 토스터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치?」. 요새 아내가 그걸로 빵을 꼬박꼬박 두 장씩 먹고 있었다. 상관없었다. 2월 28일은 내가 개인적으로 기념하고 싶은 날이어서였다.


나는 헤어짐의 역치가 낮았던 남자였다. 연인끼리 싸우고 나면 서로의 상황에 대해 헤아려보며 자신이 참고 넘어가야 할 요인을 따져서 적당히 타협하고 화해하는 게 일반적인 모습이다. 30대의 나는 상대방이 인내해야 할 요소를 거의 갖추고 있지 못했다. 잘생기지 않은 건 차치하고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것은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한마디로 좋을 때나 좋지 나와 대판 싸우고 나면 별로 참을 이유가 없었다. 사랑하면 괜찮다는 말은 어릴 적에나 통용되는 것이었다. 30대 이후의 나는 무수하게 차였다. 전 여자 친구들의 아버지들이 나를 하도 싫어해 아버지를 여읜 분을 찾아봐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도 했었다. 처음 만난 날은 그런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건져진 날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월 28일은 나에게 너무나 고마운 재조지은의 날이다.


한편 생각해보면 아내는 기념일이라는 것에 상당히 초연하다. 이는 장모님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어느 어렸던 날 아내가 장모님께 물었다고 한다. 「엄마는 결혼기념일이 언제야?」. 결혼기념일이란 것을 평생 챙겨보지 않았던 어머님은 무심하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날은 기념할만한 날이 아니야」.


결혼하기 전 아내와 몇 가지를 약속했었다. 사위 같은 며느리를 만들어 주겠다, 가정적인 남편이 되겠다, 글을 계속 써주겠다 이런 것들이었다. 매번 딸과 아빠만 둘이 본가 가고 있으니 사위 같은 며느리로 사는 것 같고, 휴지 거는 방향도 양보하고 소변도 앉아서 보니 가정적인 남편이기도 하고, 글도 꼬박꼬박 써서 올리고 있으니 어느 정도 신의는 지켰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반면에 아내는 나에게 하나만 약속했다. 체형 유지를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게 지금 논란이 되고 있기도 하다. 내 기억은 ‘체형 유지를 하겠다’라고 했다는 것이고, 아내의 주장으로는 ‘체형 유지를 하도록 노력을 하겠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내는 자꾸 지난 이야기를 들추면 이젠 노력조차 안 하겠다고 협박도 일삼곤 한다. 그러면서 처음 만날 때 입은 원피스를 회사에서 바자회 물품을 받는다고 하자 냉큼 기부해버렸다. 그리고 한마디를 남겼다. 「잊어라」. 연애 시절 나름 날씬했던 몸매의 상징이었던 그 옷은 이제 사진으로만 남게 되었다. 뭐라 할 수 없는 것이 누구 노래 마냥 「나는 먹어도 너는 절대 먹지 마」 이럴 수도 없고, 정작 나도 결혼 전보다 10kg가 쪄 버린 상황이라 할 말도 없다. 그냥 이제는 둘 다 넉넉한 풍채가 된 만큼 넓은 마음으로 서로 이해하며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요새는 매사에 심드렁하고 재미가 없는데 아마 육아라는 것이 완전 자극적이어서 그런 것 같다. 그럴 때일수록 사소해도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찾아보려고 한다. 처음 만난 날을 기념하는 것도 그런 맥락의 일이다. 부부는 보통 결혼기념일만 챙기고는 하는데, 오히려 연애할 때의 초심을 되새기기 위해서는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겨진다. 물론 그렇게 하나하나 뜻을 부여하다 보면 어느새 기념일이 무한 증식하여 일주일에 세 번씩 걸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도 하지만 가정의 평화를 지킬 수만 있다면 뭐.


언젠가 좋았던 날, 제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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