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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차갑던 모든 계절이 너로 인해 따뜻해졌다.

그 겨울은 나에게 가장 따뜻했다.

by 노래하는쌤

겨울엔 사랑을 써 보려고 합니다.

여름도 가을도 사랑이었는데 말이죠.

결국 겨울도 사랑인가 봅니다.

사랑 가득한 따뜻한 겨울 되시길 바랍니다.




여름이 막 시작되려던 어느 날, 창현선배에게 문자가 왔다.


“쌤아, 이번 주 토요일 오후에 약속 있어?”


“네. 약속 있어요.”


“너 토요일 2시 모임 취소된 거 들었어. 약속 없는 거 아니까 오후 2시에 신성동 엔젤로 튀어와.”


“약속 다시 잡았어요.”


“약속 취소된 지 10분도 안 됐는데? 더워 죽겠는데 너까지 더위 먹는 소리 하지 말고.”


“집에서 쉬기로 저와 약속을 잡았어요.”


“그건 또 무슨 신박한 뻘소리냐? 꼭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 있으니까 나와.”


“저 소개 안 받아요.”


“누가 남소 받으래? 친구야. 영주랑 수연이가 네 걱정 많이 한다고!”


“…아… 하…… 알겠어요.”


영주언니, 수연언니 이름이 나오자 나는 또 그렇게 거절하지 못했다. 결국 마지못한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카페에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두 해 전, 한여름. 스쳐 지나가듯 인사를 나눴던 얼굴. 그런데 너는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너와 나는, 서로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어색한 대화를 이어갔다.


침대에 등을 붙이고 책 한 권 읽으며 조용히 숨 쉬고 싶었던 황금 같은 주말인데, 나는 왜 이곳에 앉아 있는 걸까. 이런 생각만 맴돌았다.


그러던 중, 창현선배가 우리의 번호를 서로의 휴대폰에 저장해 주었다.


“내가 둘 다 제일 아끼는 후배니까, 서로 연락도 하고 지내.”


그렇게 연락처는 남았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쌤아, 너 국밥 좋아한다며. 밥이나 먹자.”


조별모임이 끝나고 진석선배와 홍대 근처에서 국밥을 먹었다.

익숙하면서도 불편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늘 하던 대답을 했다.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그 말이 먹히지가 않았다.


“어디에? 하늘에? 너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해?”


“선배, 미쳤어요? 하늘에 있던, 땅에 있던, 제 마음에

있던, 선배가 무슨 상관이에요?”


나 자신도 이해 못 할 만큼, 순간적으로 네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무슨 잘못된 용기가 솟았는지 너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쌤이야. 홍대 정성국밥집인데… 너 어디야? 여기 와서 네가 내 남자친구라고 해.”


정신 나간 문장이었다. 나도 알았다.


“나도 근처인데, 거기로 갈게.”


그 짧은 답장.

그 짧은 문장이, 왜 그렇게 오래 머릿속에서 울렸을까.


그리고 정말로 너는 뛰어오듯 내 앞에 나타났다.


“진석이형, 쌤이 데리고 먼저 갈게요.”


진석선배의 당황한 얼굴을 뒤로하고, 우리는 너무 어색하게 이 상황을 연기했다.


“손잡아.”


내 말에 너는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내 손목을 아주 조심스럽게 잡았다.

마음을 들키기 싫은 사람처럼, 선을 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그래서 내가 너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너의 손은… 정말 따뜻했다. 오래 기억될 만큼.


“뭐야? 너 이렇게 바로 올 거라고 생각 안 했는데?”


“나한테만 연락한 거지?”


“어… 그랬지. 네가 답장 안 했으면...”


“우리… 진짜로 만날까?”


“어…? 미안해. 내 연락이 너무 황당했지.”


“그럼 딱 두 달만 만나보는 건 어때?”


“난 모든 것에 권태기를 느끼는 사람이야. 심지어 나에게도.”


“너한테 맞출게.”


평일엔 연락하지 않기, 일주일에 한 번만 보기, 용건 외엔 연락 금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 앞에서도 너는 묵묵히 끄덕였다.


하지만 약속했던 두 달이 채 되기 전, 내 생일을 열흘 남기고 나는 너에게 이별을 고했다.

어차피 헤어질 사람에게 생일을 축하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주 차갑게.


“미안해. 나… 역시 안 되겠어. 누군가 옆에 있는 게 너무 불편해.”


그런데 너는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참기 힘들 정도로 애절한 얼굴로 나를 붙잡았다.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덜컥할 만큼 간절하게.


하지만 나는 차갑게 돌아섰다.

그게 내 방어였고, 내가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루에도 몇 번씩 네가 떠올랐다.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마음 어딘가를 계속 어지럽혔다.


10월 13일, 내 생일 저녁.

너에게 문자가 왔다.


“생일 축하해. 너희 집 앞 배수지공원인데… 잠깐 나올 수 있어?”


“미안해. 연락하지 말고… 앞으로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앞으로 연락 안 할게. 아주 잠깐이면 돼. 10분. 아니… 5분만.”


멈칫대다가 나갔다.

공원 의자에 앉아 있는 네가 보였다.

너는 어색한 미소로 책 한 권을 내밀었다.


‘기억 속으로 걷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워크 투 리멤버’의 원작 소설.


“고마워. 그리고… 나 내년에 고향으로 내려가. 짧았지만… 고마웠어. 잘 지내.”


그리고 너는 울었다.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깊게.

나는 또 한 번 당황했다.

그 눈물 앞에서.


고맙고, 미안하고, 어쩐지 가슴이 아려서…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너와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겨울, 그 해 끝에 우리는 다시 만났다.

내 인생이 너로 인해 온통 봄으로 바뀐 그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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