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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는 호박수프를

첫눈이 내린 뒤의 따뜻한 한 끼

by 정벼리

첫눈이 눈답게 내리는 해는 흔치 않다. '첫눈'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압도적인 낭만의 이미지와는 달리, 모든 처음이 대개 그렇듯 현실은 조금 찔찔하다. 눈이 오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헷갈릴 수준이거나, 하늘에서 뭔가 후드득 떨어지긴 하는데 이게 눈인지 비인지 잘 구별이 안 가거나. 그런 의미에서 올해의 첫눈은 상당한 장관이었다.


한파가 몰아닥친 날이었음에도 그날따라 아침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운전대를 잡는 대신 조금 걷고 싶었다. 가지고 있는 중에 가장 두꺼운 롱패딩을 입고,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부드러움을 간직한 캐시미어 목도리를 칭칭 감고 집을 나섰다. 몇 걸음만에 귓가에 겨울 공기가 쨍하고 내려앉았다. 종일 얼어붙어있던 허공을 갈라내고, 퇴근길에는 기어이 하얀 것 몇 톨이 눈앞을 스쳤다. 어머나, 오늘 눈이 온다더니 이렇게 첫눈이 날리는구나, 반가웠다.


사무실에서 집까지는 잰걸음으로 20분 정도의 거리이다. 횡단보도를 세 번 건너야 하는데, 두 번째 횡단보도의 신호등을 기다리는 동안 허공에 날리는 흰 것들이 갑자기 큼지막해졌다. 생각보다 눈이 꽤 오려나 보네, 생각하자마자 거짓말처럼 눈이 마구 내렸다. 흰 눈을 가득 머금고 있던 거대한 박을 누군가 콩주머니로 끝내 터뜨려 버린 것 같았다. 소복하게 쌓이기 시작하는 눈을 사부작사부작 밟아가며 집으로 향했다.


걸음걸음마다 쏟아지는 눈의 양이 늘어갔다. 세 번째 횡단보도를 건넌 뒤에는, 숫제 묵직한 함박눈이 쏟아졌다. 속눈썹에 자꾸 눈이 내려앉아 앞을 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고개를 조금 숙여 시선은 땅바닥을 향한 채 종종걸음으로 뛰듯이 걸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마주한 거울에는 양 볼이 빨갛게 얼어붙은 채 정수리 꼭대기에 2센티 정도의 흰 눈을 베레모처럼 뒤집어쓴 내 모습이 비쳤다. 첫눈이 이렇게까지 펑펑 쏟아질 수 있나. 웃음이 났다. 집에 들어와 창 밖을 내다보니 동네는 이미 겨울왕국이 되어 있었다.


IMG_4719.jpeg 첫눈 내린 퇴근길, 순식간에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다음 날에도 차키는 내려놓아야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난밤 도대체 얼마나 쏟아진 것인지, 미처 쓸어내지 못한 눈이 도로에 꽁꽁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거북이처럼 천천히 달려도 자꾸만 휘잉, 헛바퀴 돌 것이 분명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일기예보에서는 한파가 종일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하필이면 그날엔 외부 출장이 예정되어 있어 포대자루 같은 롱패딩에 폭 파묻히지 못하고, 얇은 코트와 구두를 갖춰야 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덜 추울 수 있을지 고민한 끝에, 서랍 깊숙한 곳에서 곱게 개어둔 내복을 꺼내 입었다. 모직 소재의 겨울 정장바지에 도톰한 니트 목폴라를 받쳐 입었다. 자켓 위로 코트까지 걸치니 몸의 움직임이 아주 둔탁해졌다. 밖은 미끄러웠다. 뒤뚱뒤뚱 눈사람이 걸음마를 하듯 걸었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아침부터 지쳐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 아니었다. 따끈한 커피 한 잔씩을 손에 들고 각자 어제부터 지금껏 이어진 무용담을 쏟아냈다. 평상시 차로 30분이면 도착하는 퇴근길이 어제는 두 시간 넘게 걸렸다는 이야기,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에 교통이 통제되어 인근 유료주차장에 차를 버리고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는 이야기, 신이 난 꼬맹이들을 위해 한밤중에 눈썰매를 끌어주느라 삭신이 쑤신다는 이야기, 출근길 얼어붙은 도로 위에서 자꾸만 차가 미끄러져 큰 사고가 날 뻔했다는 이야기 등으로 사무실이 가득 찼다. 어려서는 좋기만 했던 함박눈이 이렇게 엄청난 일이 된 것을 보면 나이가 들긴 했나 보다는 누군가의 말에 나는 슬그머니 웃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겨울이, 눈이 좋은걸. 펑펑 쏟아진 눈 덕택에 합계 나이가 300살이 넘는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처럼 아침부터 각자의 모험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말이야.


첫눈이 안겨준 온갖 시련과 고난을 이겨내고 사무실에 다시 모인 날의 점심은 근사한 메뉴로 골라야 마땅하다. 마침 지난달 우리 팀의 특별 성과보상으로 받은 선불카드에 아직 넉넉한 금액이 남아있었다. 인테리어가 아기자기한 브런치 식당에 갔다. 새우 로제 파스타, 스테이크 리조또, 고르곤졸라 뇨끼, 가지 라자냐... 취향껏 다양한 메뉴가 지목되었다. 주문을 마치려는 찰나에 누군가 다급하게 말했다.


"있잖아요, 오늘의 수프가 호박수프래요. 하나씩 시켜 먹으면 어떨까요? 오늘 날씨에 딱 어울릴 것 같아요."


우와, 그것 참 근사한 생각이었다. 너도나도 입을 모아 역시 뭘 좀 아는 사람이라고 추켜 세우며, 인원수만큼의 오늘의 수프를 추가 주문했다. 호박수프와 식전빵, 샐러드가 함께 제공된다고 했다. 5,500원에 인심도 후하지. 종업원은 우리에게 더 큰 테이블이 필요하겠다며, 창가의 커다란 대형 식탁으로 자리를 옮겨주었다.


IMG_4701.jpeg 호박수프, 한 수저만 먹어도 따끈한 부드러움이 온몸을 감싼다.


테이블 옆으로는 커다란 통창이 나있었는데, 바깥 풍경과 식탁 위가 서로 그럴싸하게 어우러졌다. 샐러드 위에는 치즈가 눈꽃처럼 잘게 갈려 한껏 뿌려져 있었고, 창 밖에는 아직 녹지 않은 첫눈이 군데군데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김이 솔솔 나는 뜨거운 수프. 눈처럼 흰 수프볼에 바라만 보아도 행복해지는 노란 호박수프가 찰랑찰랑 담겨 나왔다. 빵에 곁들여진 올리브오일과 발사믹식초마저 스마일, 웃고 있었다.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왕국마저 포근히 녹여줄 것만 같은 따끈함을 크게 떠먹었다. 한 수저만으로 온기 가득한 부드러움이 온몸을 감쌌다. 아, 좋다. 노란 호박수프의 마법은 훌륭했다. 몸도 마음도 따뜻해져서, 우리는 별 것 아닌 신소리에도 왁자지껄 한 마디씩 거들며 웃었다. 이보다 좋을 수 없는 한 끼가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이러니 겨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함께하면 따뜻해지고, 즐거워진다. 첫눈도 함께해야 낭만이 된다.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하니, 차갑고 시린 이 계절을 어찌 바라지 않을 수 있겠어. 당신에게도 첫눈과 함께 찾은 노란 온기를 살짝 전해본다. 이 겨울, 사소한 온기로 행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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