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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초코숲 Sep 17. 2022

11. 나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 바로 '나'

자기 비하의 늪에서 탈출하기

지금까지는 우울함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활동을 주로 적었다. 지금까지의 노력을 정리하니, 비로소 마음 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준비를 마쳤다. 감정 속에 숨어있는 내면의 어린아이를 마주하며 글을 쓰기로 다짐했다.

"넌 쓰레기야"


"넌 실패할 자격이 없어"


"너의 뒤에는 아무도 없어, 결국 그렇게 도태될 뿐이지"


오늘도 불현듯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채찍질하는 소리가 들린다. '초자아'라고 불리면서 끝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감정, 떨쳐버리려 애를 써도 틈만 주면 나타나 부정적인 감정을 발산하는 감정. 나는 이 감정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두더지'라고 이름 붙였다.


두더지는 우울 장애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필자를 괴롭히고 있었다. 회사를 잘 다니고 있던 중에도, 취할 때마다 술주정으로 스스로를 비난했었다. 휴직을 한 후에도 방심하고 있으면 두더지가 나타나 마음을 괴롭히곤 했다.


"남들은 열심히 커리어를 쌓고 있는데 너는 뭐 하고 있지?"

"커리어를 바꾸고 싶으면 그런 능력은 있니?, 아니, 노력은 하고 있니?"

"노력한다고 뭐가 바뀔까?"


때마침, 정신과 선생님과의 상담시간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증상이 조금이나마 호전되었기에 상담을 통해 내면의 원인을 파악해보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선생님께 자기 비하와 관련된 내용을 말씀드리니, 생각지도 못하게 부모님과 관련된 질문을 하셨다. 부모님도 자기 비하를 자주 하셨는지, 부모님과의 관계는 어땠는지에 대해 물어보셨다. 자기 비하뿐 아니라 대부분의 성격적 특성이 어린 시절의 관계 형성, 특히 부모님과의 애착관계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상담을 마치고 돌아와서, 과거를 되돌아보며 두더지가 나타나게 된 이유를 스스로 찾아보기로 했다. 



부모님께서는 항상 나의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해 주셨다. 다만, 집안 사정 상 부모님과의 정서적 애착을 발전시킬 기회가 적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했었다. 부모님 두 분 다 타지로 일을 나가셔야 해서 잠시 떨어져 살았던 기억도, 없는 살림살이에 압류 스티커가 붙었던 적도 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이것을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다. 아니,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가 정확한 표현이다. 학창 시절에 구축한 나의 페르소나는 '공부 잘하고, 선생님들이 좋아하고, 대인관계도 원만한 모범생'이었다. 단적인 예로, 나의 MBTI 검사는 최근 몇 년간 예외 없이 INFP가 나왔지만 친구들은 나를 ISTJ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아마 부모님께 학교생활까지 걱정하시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무의식이 작용한 결과인 것 같다.


무의식이 점점 커져다. 나중에는 스스로에게 실패를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팽창했다.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수준이 아니라, '실패하면 뒤가 없다'라는 강박관념을 가지게 된 것이다. 


대학 입시에서는 이 무의식이 긍정적으로 발휘되었다. 그러나 대학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뿐, 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가득했다. 이 시절에는 영어가 굉장한 스트레스였다. 원래 영어실력이 다른 과목에 비해 부족했었다. 학교에는 외고나 유학 경험이 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상대가 되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원어민 강사는 필자에게 '당신은 영어 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니 정말 노력하거나, 진로를 바꿔보는 것을 권한다'라고까지 말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혼자 준비해야 한다는 것도 점점 힘들어짐을 느꼈다. 한 가지 일이 생각난다. 교환학생 선발을 위한 교수 면접이 있었다. 자취방에 정장이 없어, 어떻게든 격식을 갖추려고 코트를 입고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실내에서 코트를 입다니 기본도 모르는 개념 없는 녀석!"이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누구도 비즈니스 매너를 알려주지 않았기에,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 것인데 혹독한 비판을 받고 말았다.


어느 새부터 두더지가 등장해서 채찍을 때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고, 혼자서 이 모든 걸 이겨내야 한다는 무의식이 점점 팽창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홀로 외줄을 타고 있는 상황인 것만 같았다. 아래에는 안전장치 하나 없다. 한 번의 실패는, 회복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짐을 의미했다.



학교 심리학 연구센터에서 스트레스와 뇌파와 관련된 실험에 참가한 적이 있다. '로르샤흐'검사를 진행하는 과정과 동시에 뇌파 변화를 분석했다. 검사가 끝날 무렵에 연구자가 '가장 재미있는 그림'을 선택해 보라고 했다. 필자가 선택한 그림을 보고 연구자는 다소 놀라워했다. 잠시 후, 결과를 말해주는 그녀의 말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그림을 보았을 때, 뇌파 검사로는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걸로 나타났어요. 전반적인 스트레스 수치도 높네요. 혹시 본인이 스스로가 힘들다는 것을 잘 인정하지 않으시는 타입인가요?"


실험에 참가할 당시에는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엄청난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이겨내기 위해서 하루하루 버티는 것에만 마음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침에는 '하루만 버티자'며 스스로를 속였고, 밤에는 '내일까지만 버티자'라는 생각을 끝없이 되새겼다. 실제로 이런 멘털 관리는 시험공부를 할 때는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확실했다. 속는 것에 지쳐버린 내면의 어린아이가 감정의 문을 닫아버렸다.


직장에 들어왔다. 돈을 벌어야 하는 조직에서 느끼는 압박은 돈을 쓰는 조직에서 느끼는 압박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제는 책임감이 아니라 책임이 존재했다. '감'하나 빠진 단어일 뿐인데 무게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이제는 더 이상 짜낼 감정도 없었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버티려고 노력했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정서적인 공감과 지지'가 부족했다는 의견을 주셨다. 아주 가끔, 부모님을 원망했던 때가 있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부모님이 나를 케어해주기를 바랐었다. 안 하신 게 아니고 못 하셨던 것임을 알기에, 원망을 표현하기보다는 어른스럽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했던 기억이 난다. 내면의 어린아이가 내뿜는 감정을 계속해서 무시했던 것이다.


두더지에게 고통받는 필자를 위해 선생님은 명상을 권했다.  자기 비하를 하는 스스로의 마음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어떠한 평가나 극복할 대상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왜 요가를 하면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이 드는지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변화를 관찰만 하고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통했다. 


수십 년간 쌓여온 결과를 단 몇 달간의 수련으로 바꾸는 것은 힘들다. 그렇다 하더라도 달라져야 한다. 어쩌면 지금의 우울증은 감정이 보내는 마지막 SOS 신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골든타임이 끝나기 전에 해내야 할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면의 어린아이와 화해하는 것이다.


이제는

자기혐오가 아닌

스스로를 아끼는 마음이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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