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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초코숲 Sep 21. 2022

13. 잘난척하지 않겠습니다

타인에 대한 공포와 눈치보기 극복

최근에 유료로 MBTI 검사를 한 적이 있다. 결과는 INFP. MBTI는 성격 이외에도 현재의 상황 등 많은 요소가 작용해서 생각보다 자주 변화한다. 실제로 과거에는 ISFJ, ENFP가 나오기도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다른 알파뱃이 변화해도 감정형에 해당하는 F는 꾸준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감정이 발달한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 변화를 잘 알아차린다고 한다. 나 역시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손짓 하나, 말투와 표정 변화에서 감정이 변화하는 것을 빨리 인식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관계 맺기가 중요한 한국사회에서는 쓸모가 많은 장점이다. 


그러나 뭐든 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것보다 못한 법. 지나치게 타인의 감정을 의식해서 생기는 문제도 있었다. 타인에게 지나치게 에너지를 쏟는다는 점이다. 대화를 하기 전부터 '이 대화를 하면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자체 검열을 한다. 상대방이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추임새와 몸짓에도 의미를 짐작해버린다. 때로는 대화가 끝난 이후에도 대화를 복기하면서 감정적인 문제가 없었는지 돌아본 적이 많다. 상호작용이란 나와 타인의 관계인데, 어쩌다가 타인의 생각과 감정이 우선순위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타인을 의식하는 성격은 타고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는 반대 모습에 가까웠다. 어린 시절에는  '재수 없다' '잘난척한다'라며 친구들이 놀리곤 했다. 부모님께서는 항상 '아는 것이 있어도 모르는척하고, 친구들과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씀'하셨다. 뚜렷하게 기억이 남지는 않지만, 부모님께서 그렇게까지 걱정하신 것을 보면 조금은 사회성이 부족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선거로 반장에 당선되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반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아마 반장이라는 감투와 사회성이 부족한 성격이 부정적인 시너지를 열었을 것이다. 생일파티를 열었을 때, 초대했던 반 친구들 중 아무도 오지 않았던 단편적인 기억이 있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수업을 마치고 남자아이들만 남긴 적이 있었다. 모두 눈을 감고, 한 명씩 호명되면 자기의 잘못을 이야기했다. 다만 몇 명의 친구들은 "000는 말할 내용이 없다"라는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고해에서 빠졌다. 나 역시 생각나는 잘못이 없기에, 선생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 이름이 호명되었음에도, 선생님은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마지못해 친구들에게 자주 들었던 말을 했다. "잘난척하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의 다음 말씀은, "자신의 잘못을 잘 알고 있구나"였다.


선생님까지 내가 잘난 척을 한다고 인정했다는 사실은 무의식적에 큰 충격을 줬다. 학년이 바뀐 이후에는 다시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다시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져갔다. 그때부터 타인을 우선시하는 마음이 자라났다.


어른이 되어 점점 교류하는 사람들은 늘어났다. 섬겨야 할 타인이 늘어났기에 스트레스도 기하급수적으로 커져갔다. 특히, 한국에서는 더욱 예의와 존중이 요구되는, 윗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것에는 엄청난 부담을 느꼈다. 안타깝지만 사회초년생이 되자 윗사람과 관계를 맺을 일이 훨씬 많았다. 이 스트레스도 쌓이다 결국 우울이 폭발하는 것에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과에서 이 사실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야기를 들으시던 의사 선생님께서는 사람을 무서워하는 마음이 내재되어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했다. 인간관계로 발생하는 문제에 공포를 느낀 나머지, 많은 에너지를 타인의 감정을 읽고 대응하는 데 사용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린 시절에 잘난 척을 했던 것도, 타인에 대한 공포에 대한 방어기제로 자기 과시를 선택한 것이라고 해석이 가능한 것은 덤. 


그 말을 들으면서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어려서부터 강압적인 분위기를 극도로 싫어한 점과, 압박을 받으면 오히려 뭘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학교 수련회나 군대에서 연속된 동작을 시키면, 갑자기 머리가 고장 나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게 되곤 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하는 모든 활동에 소위 '남성적'이라고 불리는 활동이 없다. 남초 집단에 있으면 마음이 불편한 점도, 지나칠 정도로 선배들을 대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도 마음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같은 원인이었다. 


자기 비하나 결정장애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 역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 기질 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은 놔두더라도 타인의 감정을 지래 짐작하는 습관은 나를 위해서 고쳐야 할 필요를 느꼈다. 역시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도 많았고, 다양한 해결책들도 찾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은 '타인은 나를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심이 없으니, 굳이 도움을 주지도 않겠지만, 반대로 굳이 해치지도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보다는 호의를 베풀어 주었던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그들의 존재가 있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내가 받은 고통에만 집중한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었다. 어디선가 흘러가는 듯 본 것 같은데,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기에 오히려 타인에게 민감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주위 사람을 10명이라고 하면, 대략 7명은 나에게 아무 관심도 없고, 2명은 나를 좋아하고, 1명은 나를 싫어한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나를 싫어하는 1명에게만 신경 썼다면, 그리고 혹시나 7명이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닌지 끝없이 의심했다면, 이제는 나를 아껴주는 2명에게 관심을 집중해야겠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지내기에도

인생은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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