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은은 방한비닐을 걷고 들어서며 모자가 있던 자리부터 살폈다.
“돌려주셨어요?”
“...... 아직요. 돌려줘야죠.”
주환은 선반에 올려둔 종이가방을 힐끗 봤다. 가방에는 소설책과 슬리퍼, 외투 한 장이 들어있었다. 모두 은경의 물건이었다. 맨 위에 헌팅캡이 얹혀있었다.
모자를 즐겨 쓰던 단골손님 재은에게는 지난주에 미리 예고해두었다. 모자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 것 같다고. 여자친구와의 이번 여행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
재은은 하고 싶은 말을 참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주환이 그래 준 것처럼 자신도 상대방의 아픈 곳을 건드리지는 말자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얼굴이었다. 주환은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하셔도 돼요.”
고백하자면 주환은 재은이 올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경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헤어지자 말하기 전부터 주환의 머릿속은 온통 은경으로 가득차서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혼자 있을 때면 홀린 듯이 휴대폰 앨범을 열어 은경의 사진을 보거나 주고받은 대화내역을 읽었다. 지난밤에는 연애 초기에 쓰던 휴대폰을 찾느라 방을 싹 뒤집었다.
주환의 친구들은 언제든 터질 폭탄이 이제라도 터져 속이 후련하다는 반응이었다. 더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란 말을 이번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부모님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헤어지잔 말을 꺼낸 건 주환이지만 그런 생각을 먼저 가진 건 분명 은경일 거라고 믿는 말투로 주환을 위로했다.
“이유를 묻는 건 실례겠죠?”
재은이 고민 끝에 물었다.
“많이 좋아하시는 것 같아 보였거든요.”
주환은 어묵국물을 두잔 떠서 하나를 재은에게 건네고 나머지 하나는 미리 썰어둔 땡초를 넣어 자기 앞에 두었다. 마음이 쓰라릴 때마다 술 대신 홀짝이려고.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아서요. 서로가 서로에게.”
“어울렸던 적도 있었다는 말이네요.”
순간 주환의 머릿속에 은경을 처음 만난 순간이 떠올랐다. 대학교 1학년, 교양으로 듣는 심리학 수업시간이었고 주환은 맨 앞자리에서 꾸벅꾸벅 조는 은경이 너무 예뻐서 내내 쳐다봤다.
은경이 고백을 받아준 날, 날아갈 것 같던 마음이 새삼 떠올라 주환은 엷게 웃었다.
“처음부터 저한테 과분한 사람이었죠. 지금처럼 뼈저리게 실감하진 못했지만요.”
주환은 내친김에 게임을 완성해 중박이라도 터트리면 은경과 결혼부터 하려던 지난날의 계획까지 다 털어놨다. 결혼은커녕 상대방이 여행가자는 말을 꺼내기도 주저할 만큼 형편없어진 자신의 현재 상황도.
“여자친구분은 괜찮으세요?”
재은의 질문에 주환은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기침이 두어 번 나왔다.
“힘들 거예요. 하지만 괜찮아지겠죠. 괜찮아져야죠. 이게 맞으니까.”
“사람관계에 맞고 틀린 게 있어요?”
“있다고 하네요. 다들 우리가 틀렸다고 하니까요.”
“그걸 왜 다른 사람들이 결정하죠? 왜 상관없는 사람들이 본인의 미래를 결정하게 두세요?”
주환은 화가 났다. 재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혈관을 타고 몸 구석구석을 찔러대는 듯 따가웠다. 그러면서도 재은이 말을 멈추지 않았으면 싶었다.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비난받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한 사람이라도, 누구라도 좋으니 한명이라도 은경과 헤어진 게 잘못이라고 말해줬으면 싶었다.
“그러는 손님은 왜 헤어졌는데요? 그렇게 좋아하면서.”
무례하다는 걸 알면서도 뱉은 말이었다. 평소의 주환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어느 한쪽은 그 관계가 틀리다고 생각했으니 헤어진 게 아닌가요.”
재은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니에요.”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흐른 후 재은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우린 그런 이유로 헤어진 게 아니에요. 죽었어요...... 남편이.”
“......”
“......”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아니에요. 이제 많이 괜찮아졌어요.”
“제가 무례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주환은 머리를 한 대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비겁한 짓을 저질렀는지 비로소 깨닫는 중이었다.
“남편 죽고 한동안 누굴 만나도 불편했어요. 사람들이 저를 위로하는 게 역겨웠죠. 돌아서면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일상을 살아갈 거면서, 싶었어요.”
주환은 어떤 말을 꺼내 것도 조심스러워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조금 전 다른 사람들 운운했던 말은 제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해요. 남편이 떠나고는 사람들 시선 때문에 말도 행동도 의식적으로 하게 되었거든요. 괜찮은 척, 잘 지내는 척 보이려고도 했고요. 그래서 여기 온 날 모자를 봤을 때 바로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내 속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게 어떤 기분일까. 지난 몇 주, 여기가 제겐 대나무숲이었어요. 저와 남편, 그리고 우주를 전혀 모르는 사람 앞이라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멈추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죠.”
주환은 문득 재은이 처음 온 날을 떠올렸다. 모니터로 전송된 메시지가 또렷이 기억났다.
- 우주는 날, 언제쯤 받아줄까?
손님의 말대로라면 헤어진 사람은 죽은 남편이다. 다시 받아주길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그 메시지는 뭐였을까? 우주는 누굴까?
“우주는,”
재은이 주환의 마음을 읽은 듯 말을 이었다.
“딸이에요.”
“딸, 이요?”
“네. 남편이 남기고 간 가장 큰 선물. 남편의 딸이었고 이제는 제 딸이기도 하죠. 근데 사람들이 자꾸 묻네요. 그 애와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재은이 입술을 떼는 모습이 버거워보여서 주환은 잠시 모자를 그대로 둘 걸, 하고 후회했다. 손님이 모자를 썼다면 힘겹게 입을 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사실 우주는, 이미 저와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헤어질 준비를 왜요?”
“우리 사이에 더 이상 남편이 존재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우리 관계를 어색하다고 여기거든요. 그걸 그 애도 느꼈을 거예요. 나는 괜찮은데,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는데, 우주는 아닌가 봐요. 어쩌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주도 우리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관계라고 생각할지 모르죠.”
주환은 종이컵을 입에 가져갔다가 이미 빈 걸 깨닫고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근데 우주가요. 오렌지주스를 하나씩 식탁에 둘 때도 있어요. 제가 오렌지주스를 좋아하는데 차가운 건 또 못 먹거든요. 남편이 살아있을 땐 퇴근길에 두 개를 사와서 우주 껀 냉장고에, 제 껀 식탁에 두곤 했어요.”
“우주가, 손님 드시라고 둔 거네요.”
“그렇죠? 그런 거겠죠?”
“물론이요. 상대방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기억하는 건 상대방을 싫어하면 할 수 없는 거죠. 몇 살이에요?”
“열일곱이요.”
“자기 마음을 솔직히 표현하기 어려울 나이네요.”
주환은 문득 우주라는 아이에게 모자를 씌워주고 싶어졌다. 재은이 모르는 그 애의 마음을 주환은 알 것 같았다. 이별은 재은보다 열일곱 아이에게 더 두려운 일일 거였다. 어쩌면 우주라는 아이는 재은보다 더 많이, 더 절박하게, 재은과 계속 함께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에요.”
“네?”
“마음을 표현하기 어려운 나이, 마흔하나도 그렇다고요.”
재은의 말을 듣고 보니 주환 자신도 그랬다. ‘마음을 읽는 떡볶이 삼촌’이면서 정작 자기 마음은 제대로 읽어준 적이 없었다. 스스로도 모르는 마음을 상대에게 표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이스박스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부르르 울렸다. 은경이었다.
- 나는 안 되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냐.
순간 주환의 마음 깊은 데서 한 뭉치의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진짜 마음이었다. 그 마음을 찬찬히 읽어주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지금은 지체할 틈이 없었다. 마음을 읽는 것도 표현하는 것도 은경 앞에서, 은경과 함께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잠깐만 기다려주실래요?”
주환은 재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장갑과 앞치마를 벗었다.
“30분, 딱 30분만 좀 부탁드려요.”
성급히 가게를 빠져나온 주환은 막 가게로 들어서려던 손님과 마주쳤다. 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 손님은 두 눈이 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눈썹이 날리게 달리다 슬쩍 뒤를 보니 교복 차림의 손님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만약 가게로 들어갔다면 재은과 마주쳤을 테고 둘 모두에게 미안하게 된 상황이지만 그마저도 나중일로 제쳐두기로 했다.
지금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딱 은경 하나만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