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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Oct 27. 2024

주환과 은경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건 제법 유용했다. 묻지 말아야 할 것, 건드리지 않아야 할 상처를 안다는 점에서 그랬다.

주환의 주변에는 그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들이 취업에 고전을 겪을 때부터 교회를 찾기 시작한 엄마는 아들이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자 새벽기도까지 드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 어떤 응답을 받았는지 아침마다 주환을 앞에 두고 설교했다.

부담스럽기로는 주환의 친구들도 못지않았다. 친구들은 퇴근길에 번번이 주환의 가게에 들렀다. 먼 길을 일부러 팔아주러 왔다는 듯 생색을 내며 술을 마시다가 취기가 오르면 본격적으로 주환의 미래를 걱정했다. 걱정의 주제는 주로 은경과의 미래였다. 주환이 눈치가 없어서 그렇지 은경도 이제는 결혼생각이 슬며시 들 시기라며, 재촉하지 않는 건 주환의 처지를 배려해서일 거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자신의 처지를 배려한다는 말이, 주환에게는 아프게 들렸다. 스스로도 모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은경은 주환을 만날 때마다 싸고 양 많은 음식점만 골랐다. 요즘은 그마저도 않고 주환의 가게에서 하는 데이트가 전부였다. 영하권 날씨에 난로 가까이 발을 대고 오들오들 떠는 은경을 보며 주환은 어제도 두 사람의 끝을 상상했다. 한겨울 추위보다 더 살을 에는 상상이었다. 이런 마음을 안다면 누구도 주환의 미래에 대해 가볍게 얘기할 수 없을 거였다.


묻지 말아야 할 것, 건드리지 않아야 할 상처. 

단골손님 재은에게 그건 ‘우주’였다. 

재은은 매운 떡볶이 한 접시를 싹 비운 날 이후 이틀에 한번 꼴로 주환의 가게에 왔다. 오후 5시. 교복 입은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가 빠져나간 후이고 직장인들은 아직 난방이 잘 되는 건물 안에 있어 손님이 뜸한 시간이었다. 덕분에 모자는 늘 재은의 차지였다.

주환은 모니터에 떠오른 메시지 덕에 재은이 누군가와 이별을 했고 상대방을 여전히 그리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 대상이 줄곧 모니터에 떠오른 ‘우주’라는 사람이 아닐까 주환은 짐작했다. 

주환은 때때로 우주가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왜 헤어졌는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기에 여전히 재은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지. 그럴 때마다 주환은 의식적으로 다른 화제를 찾았다. 떠오르는 메시지에 대해 주환이 딱히 알은체하지 않는데도 재은이 모자를 계속 쓰는 걸 지금껏 그래왔듯 자기가 아픈 데를 미리 알고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참, 요 앞에 새로 생긴 치킨집 가보셨어요? 오픈기념 반값행사하던데.”

오늘도 썩 밝지 않은 표정으로 앉은 재은에게 주환이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그래요? 매일 오가면서도 못 봤네요.”

재은의 대답과 동시에 모니터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 치킨은 우주가 좋아하는데.


또 우주다. 주환은 우주라는 사람에 대해 더 묻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말을 돌렸다.

“그럴 수 있죠. 주말에는 뭐하세요?”

“아직 계획은 없지만, 음식을 좀 만들어먹고 싶어요.”

“요리 좋아하세요?”

“아니요. 요리 자체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고 싶어요.”

재은의 얼굴에 순식간에 아쉬움이 번졌다. 주환의 시선은 모니터를 향했다. 

재은은 우주와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공원을 거닐고, 강아지를 키우고, 마주 앉아 함께 만든 저녁을 먹는 일상. 

요리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우주라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거구나. 

주환은 문득 짠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평범한 일상도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다는 조건 하나만 걸면 더 이상 평범하지 않은, 닿기 어려운 꿈이 되고 마는 게 현실이다.


“사장님은요?”

재은이 물었다.

“주말에도 일하세요?”

“이번 주는 쉬려고요. 부산에 가기로 했어요.”

“부산. 좋네요.”

“바다를 보고 싶어 해서요. 여자친구가.”


은경이 입 밖으로 직접 꺼낸 말은 아니었다. 떠오르는 대로 거침없이 쏟아낼 것 같아 보이지만 은경만큼 말을 가려하는 사람도 없었다. 종알종알 쉬지 않고 수다를 떨면서도 정작 자기 속마음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 주환은 헌팅캡을 처음 본 순간부터 다른 누구보다 은경에게 씌워주고 싶었다.

그런데 어제 은경이 모자를 썼다. 영업이 끝난 뒤였다. 주환은 집기와 식기를 모두 정리하고 잠시 편의점에 다녀왔다. 은경에게 짠 어묵국물 대신 따뜻한 유자차를 사다주기 위해서였다. 급격히 떨어진 날씨에 빨갛게 언 은경의 귀를 덮을 귀마개도 필요했다. 

다시 가게로 돌아와 유자차와 귀마개를 건네고 돌아서던 주환은 흠칫 놀랐다. 편의점에 가기 전 끈 모니터에 전원이 다시 들어와 있었다. 이미 꺼진 줄 모르고 누군가 전원 버튼을 다시 누른 모양이었다. 아마도 은경일 거였다. 가게에는 은경뿐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모자가 조금 전과 다른 방식으로 걸려있다. 입구 한쪽에 손님용으로 준비해둔 담요도 평소 주환이 정리하는 것과는 다른 모양으로 얹혀있었다. 모자와 담요로 추위를 견디다 주환의 인기척을 듣고 냉큼 원래대로 돌려둔 모양이었다. 주환이 미안해할까 봐. 모니터가 여태 켜진 줄도 모르고.

은경이 기다리고 있어서 주환은 맨 위에 떠오른 메시지만 재빨리 확인했다.


- 바다 보고 싶어.


바다. 두 사람이 즐겨 찾는 여행지였다. 취업준비로 바쁠 때도 서너 달에 한번은 부산에 다녀왔다. 마지막은 회사가 망하기 전 휴가를 내고 떠난 작년여름이었다. 숙소가 터무니없이 비싸고 해변에 사람이 너무 많아 다시는 안 올 거라며 이를 갈던 은경은 돌아오는 기차에서 곧바로 다음 여행 계획을 짰다. 바다가 붐비지 않는 추운 겨울에 오자고 했다. 칼바람을 맞아도 자기는 바다가 좋다면서.

작년겨울은 회사가 본격적으로 휘청였고 덩달아 주환도 휘청인 시기였다. 바다는 꿈도 못 꿨다. 그 후로 한해가 지났는데 은경은 여전히 그 여름의 계획을 마음에 품고 있었나보다. 

말을 하지.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주말에 부산 갈까?”


집으로 가는 길, 주환의 말에 은경은 마치 자기와 상관없는 질문을 들은 양 시치미를 뗐다.


“갑자기 웬 부산?”

“너 바다 좋아하잖아. 나도 보고 싶고.”


바다에 가고 싶은 걸 어떻게 알았냐며 은경이 놀라면 모자가 알려줬다고 솔직하게 고백할 참이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솔직히 말해달라고, 말하기가 힘들면 오늘처럼 모자를 쓰라고 얘기하려고 했다. 그런데 은경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언제 적 얘기야. 지금은 아냐.”

“아냐? 바다 보러 가고 싶은 거 아냐?”

“아냐. 추운데 바다는 무슨. 그냥 너희 집에서 놀자. 넌 좀 쉬어야 돼.”


은경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주환은 부산행 기차표를 예매했다. 예매내역을 캡처해 메시지로 전송했더니 1시간이 채 안되어 마지못해 따라간다는 투로 전화가 왔다.


“참, 숙소도 구했는데, 볼래?”


뒤이어 은경이 보내준 링크를 따라가 보니 창밖으로 그림처럼 펼쳐진 바다와 노을이 나타났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숙소였다. 은경이 카드 이벤트가 어쩌고 경품이 어쩌고 둘러대는 말이 거짓말인 걸 주환은 단번에 눈치 챘다. 하지만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은경과의 여행에 작은 흠집도 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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