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점심시간 사용설명서
승진시기만 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회사의 승진시스템이 나라는 개인에게 불리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다.
우리 회사는 연공서열을 꽤 중요시하는 편이다. 업무 성과를 계량화하기 어려운 회사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연공서열 위주의 평가가 부서 단위로 이뤄지는 데 있다.
최근 몇 년, 동기들이 부서별 최고참 자리에서 근무평가 점수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동안 나는 더 고참인 선배들의 점수를 받쳐주는 역할을 맡아왔다. 한 선배가 승진을 하면 또 다른 선배가 위에 얹히고, 그 선배가 승진해 이제 내 차례인가 하면 또 다른 선배가 얹히는 식이었다. 올해 처음으로 부서 내 최고참이 되었는데, 지난달 복직한 선배가 어김없이 또 우리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결국 이번 승진에서도 떨어졌다. 이번 승진자 명단에는 후배들도 여럿 있다. 개중에는 가벼운 업무 한 꼭지도 산처럼 부풀려 포장하는 걸로 직원들 입에 오르내리는 직원도 있다. 선배 없는 자리, 눈에 띄는 업무만 잘 찾아다니더니 마침내 다디단 열매까지 거두는구나 싶어, 솔직히 얄밉다.
하아, 쓰리다 쓰려.
기운이 빠졌다.
팀장님 부서장님 이사님 얼굴은 보기도 싫었다.
안 읽은 업무 메일들도 도무지 열어 볼 의욕이 나지 않았다.
그냥 멍하게 앉아서 스스로에게 주문을 넣는 중이었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월급은 받고 있잖아.
적어도 그만큼은 해야지.
그때였다. 사내 메신저가 반짝였다.
- 차장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2년 전엔가 친한 동료의 소개로 같이 점심을 먹은 적이 있는 입사 3년 차 후배였다.
- 잘 지내죠? 오랜만이에요.
당연히 업무 관련 연락이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상대방이 입력 중이라는 상태가 꽤 오래 표시된 후 도착한 메시지는 예상밖의 내용이다.
- 저 신입이었을 때 차장님이랑 같이 밥 먹었던 시간이 너무 좋았거든요. 그 뒤로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구요. 제가 이번 전보대상이라 다른 지역으로 옮길지 몰라 그전에 식사 한번 같이 하고 싶은데 어떠세요? 저는 다음 주 언제든 괜찮습니다.
메시지를 받고 내 표정이 어땠을까?
입꼬리가 올라가서 한동안 내려오질 않았다.
승진에서 떨어진 것 따위는 아무 문제도 아닌 일이 되어버린 것처럼. (바로 다음 순간 아무 문제도 아닌 일이 되지는 않았다는 걸 다시 깨달았지만.)
이 마음을 공유했더니 남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뭐? 밥 사달라는 말이잖아."
"응. 맛있는 거 사줘야지."
"너가 사주는 건데 그렇게 좋을 일이야?"
"너한테 밥 같이 먹고 싶다고 연락 오는 후배 있어?"
남편이 곰곰 생각하더니 대답한다.
"없네. 없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같이 점심 한 끼 하고 싶을 만큼 좋은 사람, 괜찮은 선배로 인정받은 것 같아서.
그래, '인정'.
먼저 승진한 동기들(+후배들)보다 월급을 적게 받는다는 억울함 이상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상실감이 컸다.
내가 이만큼 열심히 하는데 회사는 그걸 몰라주네, 싶었다.
근데 회사가 안 해준 인정을 후배가 해주니까, 고마웠다. 내게는 어떤 위로보다 큰 위로였다. 동네에서 제일 비싼 스테이크라도 사주고 싶을 정도였다.
나도 안다. 단지 나와 밥을 한번 먹고 싶다는 게 전부인 메시지에 내가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걸. 근데 솔직히, 10년 넘게 차이나는 선배랑 밥 먹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흔한 마음은 아니지 않나?
지금은 이런 자화자찬이라도 필요한 시점이다.
흥! 대진운 좋고 눈치 빠르고 윗사람들한테 잘하는 사람들아,
너네는 쭉쭉 잘 나가는 선배 해라.
나는 계~속 좋은 선배 할 테니까.
동기들 나 빼고 다 부장 되더라도 주눅 들지 않고 빌런이 되지도 않고 꿋꿋하고 담담하게,
평소처럼 일하는 멋진 선배가 될 테니까.
그래서 나중에 퇴직한 후에도 가끔 나 사는 동네에 놀러 온 후배들에게서
"집에 계세요? 시간 되시면 점심이나 같이 할까요?" 연락받을 거니까.
이렇게 잘 정리되면 좋겠지만, 마음이 또 그렇게 쉽지가 않다. 멀쩡히 일하다가도 종종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든다. 어제도 억울한 마음이 불쑥 올라와서 옆자리 후배에게 물었다.
"우리 외할머니가 90 넘게 사셨고, 외삼촌은 지금 80대인데도 헬스장에서 근력운동하시거든요. 나도 오래 살 수 있겠죠?"
후배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것 같은데요? 갑자기 왜요?"
"최후의 승자가 되고 싶어서요. 수명으로."
"... 아... 오래 사실 수 있을 거예요. 반드시."
살짝 불안한 건 아빠의 부모님은 수명이 그리 길지 않았다는 점.
내 수명이 엄마네 가족들을 닮길 고대하며, 운동을 하자. 운동이라도 해야겠다. 오래라도 살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