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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Jan 25. 2021

말'이' 느린 아이? 말'은' 느린 아이!

생후 22개월 무렵의 발달과제 중 하나는 '단어의 결합'이다. '엄마 빠빠', '아빠 빨리', '엄마 우유 줘요'처럼 두 가지 이상의 단어를 결합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이가 작고 사랑스러운 입을 오물거리며 말을 걸어오면 얼마나 귀여울까. 나보다 먼저 출산한 지인의 아이 몇이 18개월 무렵부터 두 가지 이상의 단어를 붙여 말하는 걸 보았던 터라 그 시기를 앞두고 내심 기대를 했다. 부모가 자주 쓰는 말을 먼저 배운다기에 아이 앞에서는 의식적으로 예쁜 말을 쓰기도 했다.


아빠, 기저귀 갈아줘요.

엄마, 냉동실에서 블루베리 꺼내 줘요.

책 읽어 주세요.

이제 곧 22개월이 되는 아이가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들이다. '말'이 아니라 '몸짓'과 '눈빛'으로.

평균적으로 단어를 결합할 수 있게 된다는 22개월을 앞두고 우리 아이가 발음할 수 있는 단어는 오직 네 개다. 아빠. 엄마. 무아(물). 우아(우유).

태어난 지 만 2년이 채 안된 아이에게 부정적 의미가 깃든 수식어를 쓰고 싶지는 않지만,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기는 더욱더 싫지만,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우리 아이는 말이 느린 편이다.


우리 엄마가 종종 입에 올리는 오래된 에피소드 하나.

서너 살 무렵의 나는 뒷집 사는 동갑 여자애보다 말이 많이 늦었다고 한다. 뒷집 아저씨가 딸에게 말 못 하는 나와 놀지 말라고 했다는 걸 전해 들은 엄마는 나를 데리고 대도시의 언어치료센터를 찾아갔다. 몹시 추운 겨울날이었고 센터는 집에서 편도로 세 시간 거리에 있었다.

하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바나나 모형을 든 선생님이 "이게 뭐지?" 물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날 이후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던 걸 보면 내가 어설프게라도 대답을 하긴 했었나 보다.


어린 내 손을 잡고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며 맹추위를 뚫었을 엄마의 그날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참 별나기도 하시지. 느긋하게 좀 기다리면 될걸.'

엄마의 마음은 내가 받아쓰기를 할 때도 구구단을 외울 때도 고등학교 입시와 수능을 준비할 때도 늘 나보다 바빴다. 또래들보다 내가 뒤처질까 봐 전전긍긍하셨다. 엄마는 가끔 내 동창 누구가 어느 회사에 취업을 했다거나 누구네 딸이 얼마 전 결혼을 했다는 말로 내 속을 긁어놓았는데, 나는 그게 엄마 안에서 수백 번 돌고 돌던 염려와 불안이 어쩌다 한번 엄마의 입술 틈 사이로 툭 비집고 나온 것임을 알았다.


딸이 평균에서 뒤처지지 않기를 바라는 엄마의 분주한 마음을 은근한 부담으로 느낀 탓일까. 나는 여유로운 엄마가 되고 싶었다. 아이가 어련히 알아서 할 때까지 기다려주고 싶었다.

'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스스로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기를 바랐다.

때가 되면 하겠지.

오랜만에 손녀를 만나 "엄마 해봐", "빠빠 해봐" 부추기는 외할머니의 입을 단속했다. 아이가 입을 열어주기를 기대하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18개월, 19개월, 20개월이 지나고 이제 곧 22개월. 아이가 발음하는 단어의 개수는 몇 달째 그대로인 채 어린이집 입소일이 성큼 다가왔다. 낯선 애들이 갖고 노는 저에게는 없는 고무공을 부러운 눈으로 보듯 말 잘하는 아이들 틈에서 주눅 들어 있을 아이를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참 별나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그날이 차츰 이해되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책, 싫어하는 음식이 생긴 아이에게는 이제 하고 싶은 말도 넘쳐날 것 같다. 아이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생각들은 뭘까. 잘 놀다가 갑자기 엄마에게 토라져서 눈도 마주쳐주지 않는 순간의 아이 마음을 듣고 싶었다.

기분이 상해도 말로 표현하지 못하니 소리를 지르거나 울어버리고 마는 그 속이 얼마나 답답할까.


어린이집 이름표에 쓰려고 찍은 생애 첫 프로필 사진. 아이들 속에서도 지금처럼 늘 웃는 얼굴이길.


"우리 지안이 잠깐 이리 와 봐."

저녁식사 후 아이를 불렀다. 다행히 아이는 말귀는 제법 알아듣는다.

무릎에 앉은 아이에게 "아~ 해봐." 했더니 "아~" 하고 곧잘 따라 한다.

"와, 잘하네!" 칭찬하고 난이도를 조금 높여 "가~ 해봐." 하니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아빠, 하던 걸 떠올려 "빠~ 해봐." 했더니 바로 "빠~" 하길래 "뽀~" 해보라니 고개를 홱 돌린다.

'뽀~'라는 발음을 아이에게 말로 알려주려다 막막해졌다. 내게는 너무 익숙하고 당연해서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30년 넘도록 해온 발음을 설명하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하기는 얼마나 더 어려울까.


맘카페에 '말하는 시기', '22개월 언어발달' 등의 키워드를 검색해보았다. 14개월에 말을 시작했다는 아이도 있는 반면 30개월이 되도록 엄마, 아빠밖에 못한다는 아이도 있다.

'22개월인데 말이 너무 느려요'라는 제목을 누르니 '아직 엄마, 아빠, 까꿍, 까까, 어부바 밖에 못한다'는 내용이다. 말이 느리다는 아이조차 우리 아이보다는 빠른 것 같아 슬쩍 의기소침해졌다. 하지만 스크롤을 내려 댓글을 보니 조금 마음이 놓인다. '26개월에 엄마, 아빠만 하던 아이가 27개월부터 수다쟁이가 되었어요', '22개월 때 응응만 하더니 지금 28개월 이거 해줘요 싫다 치카 안 할 거야 해요', '34개월 넘어서 입 트였어요'...

단어를 결합해 말하는 시기는 평균 22개월 무렵이지만 내 지인의 아이들처럼 18개월에 이미 재잘재잘 말을 하는 아이도 있는 반면 우리 아이처럼 조금 늦게 입을 여는 아이도 있는 거다. 평균 결혼연령이 30.6세라도 누군가는 25세에 누군가는 35세에 결혼을 하는 것처럼, 성인 여성 평균 몸무게가 57kg이라도 누군가는 50kg 누군가는 65kg인 것처럼, 말을 하는 시기에도 아이들마다 차이가 있는 거겠지.


부모가 된 이상 시기별 발달과제를 객관적인 통계자료로 볼 수만은 없고 아이의 말이 늦은 걸 단순히 통계치의 오차범위로 간주할 수도 없다. 통계자료와 또래 아이들을 참고 삼아 우리 아이의 발달에 문제는 없는지 관심 있게 살피는 것은 아이의 발달과제만큼이나 중요한 부모의 과제다.


하지만 내 불안과 걱정이 아이에게 전달되지는 않도록 노력해야지.

우리 아이는 말이 느리지만 블록을 아주 높이 쌓을 수 있고 음악이 나오면 춤도 잘 춘다. 맛있는 음식을 뽀로로나 짱구에게 먹여주는 시늉도 곧잘 하고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아한다.

단지 아직 '말'하는 법을 깨닫지 못했을 뿐인 아이를 무한한 사랑과 관심으로 응원해줘야지.

믿고 기다려줘야지. 우리 엄마가 내게 해주기 바라는 대로.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말 늦은 아이, 어떻게 할까? (4세 아이에게 꼭 해줘야 할 58가지, 중앙M&B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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