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는 외로워
만 30세에 꿈을 한가득안고 무모하게 이 곳으로 건너왔다. 단순히 해외에서 살고싶은 마음으로 온게 아니다. 내 직업의 정점이라고 생각해온 할리우드 무비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워낙 컸기에 일 외에 다른 부분은 생각지도 않고 온 것이다.
다행히도 나의 선택은 나를 이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고, 원하던 목표를 '조금이나마' 이룰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 댓가는 생각보다 큰 듯 했다.
5년이라는 시간을 한국에서 CG아티스트로 살아왔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많이 바쁜만큼 많은 포트폴리오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다. (젊기도 했고...)
첫 번째 회사에서는 숙직실이 있었는데, 하루이틀 밤샘작업은 기본이며 언제 걸려올지도 모르는 클라이언트의 전화에 상시대기하며 핸드폰을 손에쥐고 숙직실 2층 침대에서 잠들곤했다.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고 싶었으면, 회사 바로앞에 고시원에 방을 잡고 그 곳에서 2년간을 살았을까?
하루는 같이 일하던 팀장님이 나에게 '바퀴벌레 퇴치제'를 써보라며 주셨다. 내가 그 전에 밤샘 작업하면서 고시원에 바퀴벌레가 나와서 고민이다라고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겠지. 내가 살던 고시원에선 가끔씩 바퀴벌레가 나오곤 했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싫어하는 것이 바퀴벌레인데 (첫 번째는 쥐), 자려고 불 끄고 누우면 그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 소리가 싫어서 이때부터 막걸리 혼술을 하기 시작했나 보다.
두 번째 회사에서 가장 놀랐던 점은, 숙직실이 없다는 것. 그리고 무조건 퇴근 시켜준다는 것. 지금까지의 내 상식에선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회사가 파주 출판단지에 위치해 있어서, 통근버스를 놓치면 발이 묶이는 상황이라 집에 안갈래야 안갈 수가 없었다. 너무 행복했다.
하지만 회사 이전후에는 회식이라는 녀석이 날 기다리고 있었는데, 새벽까지 일을 마친후에 여지없이 같이일하는 동료들과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목으로 매일같이 술을 마셔댔다. 그리고 그 다음날 숙취를 안고 일을하고, 그리고 새벽에 끝나면 다시 술을 마시러가고...이런 생활의 반복은 밤새서 일하거나 숙직실에서 자거나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런 생활중에서도 놓지않았던 것은, 해외에서 일을 해보고 싶었다는 것. 그리고 내 모든 작업의 초점은 포트폴리오 만들기 였다는 것.
그래서 이런 고된 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곳 캐나다에서 맞이한 프로젝트들. ( 글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다른 짧은 프로젝트들도 여럿 했었습니다 ) 이 곳은 다른의미의 고생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업무강도와 영어. 업무강도는 한국에 비할바가 못되는 것이, 하루에 최소 두 번씩 미팅이 있는데, 그 미팅에서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점심도 자리에서 먹으며 일하곤 했다. 더구나 영어를 못하기에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최소 한개에서 두개의 더 많은 버전을 보여주며 내가 말하려는 바를 보여주는 형식으로 표현해야 했다.
영어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말할 것도 없이 제일 힘든 부분이었다. 원하는 바를 맘껏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렇게나 힘든 것이구나를 느꼈다. 외노자건 뭐건 그냥 벙어리가 되는 기분? 내가 선택한 일이기에 묵묵히 이겨나가야 하는 부분이었다.
이렇게 나를 갈아가며 이 곳으로 끌고 왔지만, 더이상은 안되겠는지 나에게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쉬는날이면 무기력하게 침대에서 하루를 보내고, 와인과 맥주로 남은 시간을 때우곤 했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무슨일을 하고 있는건지, 이게 내가 바래왔던 일이었는지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익히 들어만 오던 번아웃이 나에게 온 것이다. 이제는 조금 쉴때라고.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는 내 인생에 있어서 첫 해외여행이나 다름없었다. 제주도를 가기위해 국내선 비행기 한번 타본게 내 비행기에 대한 경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첫 해외여행을 북미로, 그것도 14시간이나 비행해야 하는 곳으로 오다니.
처음 6개월은 아무 생각없이 지냈다. 일이 바빴기에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인식하지도 못한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리고선 깨달았다.
'아 내가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있구나.'
가족, 여자친구, 친구들. 한국에서 일할때는 몰랐는데, 막상 떨어지고 나니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혼자 하는 출근과 퇴근. 혼자 하는 식사들과 혼자 맞이하는 명절들.
'내가 어떤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이 곳에 온 것일까? '
이런 생각들이 올라오면서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이젠 집에 가고 싶었다. 이런 공간이 아닌 따뜻한 우리집의 냄새가 그리웠다.
아 이게 향수병이구나.
항상 목표를 잡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달려왔다. 한국에서는 그렇게하지 않으면 뒤쳐지니까. 이런 생존경쟁에 익숙하고, 단순히 할리우드 영화에 참여하자라는 목표만 가지고 있던 나에게, 달성 후에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 삶의 원동력이었던 목표를 달성하자 (물론 아주 조그마한 달성이지만요), 목표가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원동력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현재가 아닌 미래를 위해 살아왔던 사람의 모습이 이것이었나?
나에게는 목표가 필요했다. 게임으로 따지자면, 달성하고 완료해야 하는 미션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그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의 다음 스텝은 뭘로 하지? 난 어떻게 살아야하지? 앞으로 50년 이상 더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왔던 캐나다행이, 오히려 목표의 부재와 혼란만을 가중 시킨 것이다.
위에 나열한 어떠한 한 가지 이유로 그때의 무기력/그리움/외로움/공허함이라는 감정이 온건 아니라 생각한다. 여러 경험들과 복합적인 상황들의 축적으로 인해 '그때의(글 상황으로써는 지금의) 나' 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한가지 말만 떠올랐다.
'집에 가고 싶다, 쉬고싶다'
이제는 휴식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조금은 마음의 부담감을 내려놓고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나는 캐나다 300일 즈음 될 무렵, 내 인생의 첫 무기력/그리움/외로움/공허함을 경험했다. 한동안은 회사에 출근하는 것도 퇴근하는 것도 무의미한 느낌 뿐이었다.
그렇다고 모든것을 중간에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원래의 나로 다시 돌아가는일. 나는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꾸준히 해오던 산책과 더불어 농구도 다시 시작했다. 근처에서 싼 농구공 하나를 사서 공원에 있는 코트로 갔다.
이 루틴은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답답하고 힘든일이 있을때마다 해오던 습관이다. 가끔 종교를 찾아 마음을 의탁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 방법이 제일 좋더라. 혼자 코트로 가 있을때면 다른 생각들은 잊게된다. 오로지 공을 던질떄에 슛폼과 손끝의 감각. 그리고 좋은 공을 받기위한 움직임들, 달리기 등등. 머릿속으로 혼자만의 경기를 30분 정도 뛰고나면, 온몸이 흠뻑 젖는다. 그러면 몸과 마음이 많이 누그러 지고 잠도 잘 온다.
캐나다에와서도 나만의 이 방법은 통하더라. 가끔 코트에서 공던지고 있는 다른 누군가가 있으면, 같이 한 게임 부탁해서 1:1을 하거나 2:2, 3:3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조금씩 누그러 뜨리고 다시 올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노력했다.
다시 이 일을 시작했을 때의 재미를 찾고 싶었다.
그리고 그 재미를 드디어 '명탐정 포켓몬' 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 재미는 다른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바로 주위 동료들, 그리고 내가 만드는 작업에 대한 소소한 성취감에서 그 재미를 찾은 것이다.
이렇게 나는 혼자만의 큰 위기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