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지나 벌써 2019년 2월 언저리 무렵.
많은 즐거움과 고생을 함께했던 '명탐정 피카츄'가 점점 끝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새해가 지나 프로젝트는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죠. 슬슬 야근의 빈도수도 늘고 있었고요.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즐거웠던 부분들을 세가지 꼽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은 예고편 작업을 했을때였고, 두번째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작업에 대해 얘기하는 순간들, 마지막으로는 어려운 샷들의 요청을 받아서 그 문제들을 해결했을 때 였습니다. 그리고 이 곳의 작업문화에 대해 더 잘 알게된 순간들도 포함시킬 수 있겠네요.
피카츄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위 내용에 대해 정리해보겠습니다.
예고편에 대해서는 이전 글에서 자세히 다루었기 때문에, 자세한 언급을 하진 않겠지만, 이것을 통해 분명 많은 것들을 얻은것은 분명합니다. 할리우드 영화들의 예고편 진행은 어떻게 이루어 지는지, 그리고 컨셉아트를 얼마나 현실적으로 잘 구현해 내는지가 관건이더라고요.
참 힘든만큼 보람이 컸었던 작업이었습니다.
'can I borrow your eyes?'
눈을 빌린다니 무슨말인가 싶겠지만, 작업하면서 많이 들리던 문장중에 하나 입니다. 말 그대로 눈을 빌린다는 뜻으로 잠깐 시간을 내서 내 작업물을 한번 봐주겠니? 라는 뜻입니다.
CG 작업도 그림그리기와 마찬가지로 작업을 하다보면 스스로 본인 그림에 빠져서 냉정하게 평가하고 바라보지 못하는 때가 생기는데요. 그럴때에는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에 대해 정확한 상황판단을 해야할 때가 옵니다. 이런 부분은 보통 슈퍼바이저나 리드들에게 요청해서 받을때도 있지만 주위 친구들에게 요청해서 받을때도 있습니다.
한국선배님들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다른 외국동료들도 이런 요청에 혼쾌히 승락하여 본인의 시간을 내 작업물을 위해 써주었습니다.
'이 부분이 조금 튀는것 같은데?'
'이 부분은 좀더 뿌옇게 처리하는게 좋을 것같아.'
'좀더 반짝하는 느낌을 주면 더 좋을것 같은데?'
한 두 사람에게만 요청해도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샘솟듯 쏟아지곤 했습니다. 물론 제가 예상했던 내용들도 있었지만 예상치못한, 제 허를 찌르는 시선들도 존재했기에 이를 통해 많은것들을 배울 수 있었죠.
이 과정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데도 약간의 시간이 걸렸던 것이, 아무래도 본인 작업물에 대한 자존심/자부심, 그리고 내가 더 뛰어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수 있는 내용들이라, 스스로를 낮추는 방법을 알아야 했죠. 당연히 제 입장에서는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은 1도 없었거니와 주위 한국 선배님들의 작업을 대하는 태도들을 통해 '이렇게 해야 내가 여기서 적응할 수 있겠구나' 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를통해 그림이 더 나아지는 경험을 많이 했죠.
절대 스스로의 우물안에 빠져있으면 안된다는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합성(컴포지팅)' 파트는 사실 문제 해결하는데 익숙해져야만 하는 파트입니다. 많은 부분들을 3D 파트에서 해결하는것을 권장하지만, 시간적/물리적 한계로 인해 '합성(컴포지팅)' 파트에서 해결하는 부분도 상당하거든요. 그 중 하나의 장면이 '메타몽(디또)'이 극중 한 인물로 변하는 장면이었습니다. 하루는 합성 슈퍼바이저가 제 자리로 와서 물었죠.
'헤이 사쿠, 혹시 장면 하나가 있는데 테스트 해봐줄 수 있어?'
'응 당연하지, 어떤 장면인데?'
'극중에 한 요원이 메타몽(ditto)으로 변했다가 폭음룡(explode)라는 포켓몬으로 다시 변해서 에너지를 쏘는 장면이야. 지금 다른 아티스트들도 작업하고 있고, 한번 테스트 해봐줄 수 있겠니?'
보통 이런 경우는 잘 없는데, 시간이 촉박할 경우 이렇게 두 세명의 아티스트에게 같은 작업을 시켜서 다른 스타일의 결과물을 얻으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회사입장에서는 하나의 장면으로 두 세명의 인력을 투입해야 하니 인력낭비일 수 밖에 없겠지만, 이런 상황들도 더러 발생하더군요.
이리 해봤다가 저리해봤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스를 섞어서 장면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번의 컨펌 끝에 제 장면이 최종 선택되었습니다.
아래가 직접 작업한 장면입니다.
이런 상황의 작업을 해본적이 없었기에 지금 봐도 많이 어색한 부분이 많지만, 그 당시에는 최선을 다해서 만들었습니다. 최대한 액체처럼 보이게, 꿀렁꿀렁 한 느낌으로 변할 수 있도록 한 프레임 한 프레임씩 작업을 진행 했었죠.
애니메이션으로만 표현되었던 장면을 실제 상황이라는 가정하에 표현해야 하니, 그 누구도 결과물의 정답을 알 수 없었죠. 다른 여러 표현의 작업물들을 놓고,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니 슈퍼바이저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부담이었을 거라 생각되네요.
그래도 제가 만든 결과물이 선택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내가 이 곳에서 조금이나마 경쟁력을 갖고 있구나 라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순간이었거든요.
하루는 합성 슈퍼바이저가 아티스트들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 사진 찍을때 모두 피카츄 복장을 입고 찍는게 어때?'
응??? 사진을 피카츄 복장을 입고 찍는다고? 그리고 그 날 이후부터 오피스는 즐거운 분위기로 가득했습니다. 누가 어떤 복장을 가져오면 다들 즐거워서 얘기를 나누곤 했죠. 저에게는 너무나 어색한 문화였지만요.
그리고 사진찍는 당일날 대부분 피카츄 복장을 입고 회사내 계단에 모여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런 피카츄판이 있었을 줄이야.
아래의 사진은 그 날 이후, 회사에서 오피셜하게 찍는다고해서 옷이 회사내에 있는 사람만 입고 찍은 사진입니다. 사실은 아래보다 훨씬 더 많이 입고 찍었었어요...
다들 이렇게 작업문화를 즐기는 구나 싶더라고요. 야근도 많고 업무강도도 쎄지만, 이러한 분위기가 아티스트들로 하여금 덜 스트레스 받고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직은 어색한, 적응이 한참 필요한 문화중에 하나였습니다.
이렇게 3월 말즈음이 되어서야 '명탐정 피카츄'는 프로젝트 매니저의 메시지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WE ARE FINAL!!'
처음과 끝을 모두 경험한 첫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는 순간이었죠. 많은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동료들과 함께한 즐거운 순간들이 더 많았던 '명탐정 피카츄'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