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지만 강렬했던 플래그폴의 기억
'헤이 스탑!, 웨얼 알유 고잉?'
총으로 무장한 군인이 저를 불러세웠습니다. 저는 바짝 쫄아서 슬금슬금 다가갔죠. 그리고는 뭐라고 계속 말하더군요.
'너 어디로 가고있는거야? 뭐하는거야 여기서?!, 왜 그쪽으로 넘어가는거야?'
'응? 나 미국 국경을 넘어갔다..가...'
'뭐라는거야??!'
'나 플래그폴 하러 왔어...'
'하....그거 여기서 하는거 아니야, 저 쪽으로 가야돼. 조심하라고.'
'아아...그렇구나 고마워..미안해...'
저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아닌, 차 옆 갓길로 혼자 당당히 걸어가다가 군인에게 붙잡혔던 것이었죠. 살면서 미군한테 붙잡힐만한 일이 많진 않겠지... 좋은 경험했다 생각하자...
2018년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1년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자의 만료일이 다가오고 있었죠. 다행히 회사에서는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중이었고, 저에게 3개월의 단기 비자를 서포트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저 같은 상황이었을거예요. 이 곳에서 일을 하고 싶지만 프로젝트가 없으면 밥벌이를 할 수 없는 현실...
어쨌든 비자와 업무 연장 계약서에 사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회사내 비자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변호사가 저를 불러서 제가 해야할 일을 A부터 Z까지 설명해 주더군요.
'사쿠, 너의 비자가 곧 만료 될거야. 이제부터 회사에서 너의 비자를 서포트 해줄건데, 온라인으로 신청할래? 아니면 플래그폴로 할래?'
'무슨 차이가 있어?'
'온라인은 몇달 걸리고, 플래그폴은 당일발급이 가능해. 다만 너가 직접 캐나다/미국 국경으로 가서 미국을 밟고 캐나다로 넘어와야해.'
'응..??????'
'생각해보고 알려줘~'
미국국경을 직접 내발로 넘어갔다가 돌아오라고? 그게 가능한거야? 퇴근후 인터넷으로 관련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다행히 많은 워홀선배님들, 그리고 이 곳에서 일하고 계시는 많은 분들이 블로그 자료로 남겨주셨더라고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비자관련 서류를 회사측으로부터 받은뒤 국경으로 간다. 그곳에서 '플래그폴' 하러왔다고 하고 미국국경을 잠깐 넘어갔다가 다시 캐나다로 돌아온다. 돌아오면서 이민국으로 와서 비자를 재발급한다.
내용은 심플했습니다. 다만 초행길을 나 혼자서 잘 다녀올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이 있었죠. 하지 않으면 이 곳에서 일을 할 수 없으니, 저에게 두번째 방법이 있을리 만무했죠.
회사측으로부터 두꺼운 서류뭉치를 받아들고, 무작정 버스를 타고 국경으로 향했습니다. 버스가 국경까지 이어져있진 않았기에 근처에서내려 걸어가기로 마음먹었죠.
버스에 내려 도착한 곳은 국경에 위치한 '화이트락' 이라는 동네였습니다. 그 곳에서 저를 반겨준건 넓게 펼쳐진 수평선이었죠. 이제 막 벚꽃이 피기시작한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 국경까지 갓길을 통해 끝없이 걸어가야 했습니다. 한 두 시간은 걸었던 것 같네요.
분명 나같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을텐데?
아니요. 국경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은 저 밖에 없더군요. 쌩쌩지나다니는 차 들 옆으로 혼자 걸어가려니 조금은 겁이 났습니다. 이럴줄 알았으면 아는 지인한테 부탁해서 같이올껄... 후회해도 늦은 걸 알았기에 서둘러 길을 재촉했습니다.
구글맵 길을따라 아픈다리를 이끌고 걸은 어언 한 시간, 드디어 목적지가 눈앞에 보였습니다.
그제서야 그 곳에서 이동하고 있는 인파를 확인할 수 있었죠. 국경만 넘으면 미국 시애틀이기에 관광차 오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더군요.
하지만 제 목적은 '플래그폴'.
걸어서 국경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열심히 찾았습니다. 분명 몇몇은 국경쪽으로 걸어가더라고요. 그런데 나와 반대편에서 걸어가고 있네?
나도 걸어가면 국경이 나오겠지? 그런데 왜 인도가 없고 계속 갓길만 있을까? 저는 무작정 걷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톨게이트 같은 구간의 갓길을 지날무렵.
'헤이헤이 ! 스탑스탑!!!'
총으로 무장한 군인이 저를 불러 세우더라고요. 그리고는 손짓으로 이리로 오라고 했습니다. 잔뜩 쫄아서 가니 왜 거기로 넘어가고 있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준비한 영어를 했습니다.
'아임 히얼 투 플래그폴 !'
그리고는 빤히 저를 쳐다보더니, 이 곳이 아니라 저기 반대편의 오피스로 가야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알고 보니 제가 가던 길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아니고 자동차 전용 구역이더라고요. 사람들이 다니는 곳은 제가 있던 곳 맞은편 인도로 다닐 수 있었고요.
그 군인 입장에선 왠 동양인 친구가 당당하게 오피스 반대편 풀숲길로 걸어가는게 밀입국자 처럼 보였을 겁니다. 그리고 말을 무시한채 계속 걸어갔다면 당연히 귀찮은일에 휘말렸을것이 뻔했고요. 다행히 저는 오피스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제 차례를 기다렸죠. 아마 입국 신고서 같은거였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플래그폴하러 왔다고 재차 말하니 몇몇 서류를 저에게 주더군요. 그리고 저는 그들의 안내를 받고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는 또다른 오피스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프로세스는 시간이 조금 걸리긴했지만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마침내 새로운 3개월짜리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3개월 더 있기위해서 매번 이런 고생을 해야한다고?'
10배는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왔던길을 되돌아 갔습니다.
점점 어둠이 내리는 길에, 집으로 되돌아가는 버스 불빛이 어찌나 반갑던지요.
외노자의 삶이란 고달픈것이다 라는 것을 느낀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