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름끈 Jun 14. 2024

리스보아 카드의 함정

To Portugal 7) 관광객을 위한 카드 리스보아 카드

* Sawu bona(사우보나) : 아프리카 줄루족의 인사말. '나는 당신을 봅니다'라는 뜻. *


 학창 시절에 가끔 친구들과 함께 아웃백에 가게 되면 인터넷에서 꿀팁이라는 정보들을 다 긁어모아 능숙한 척 이렇게 주문하곤 했다. "수프는 샐러드로 바꿔 주시고요, 사이드 감자튀김 위에는 치즈를 올려 주세요.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하면 적은 추가금으로 메뉴 두 개를 더 주문해서 먹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글들을 봤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는 특별히 샐러드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오지치즈후라이 역시 조금만 먹어도 물리는 맛이라 생각했을 때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저렇게 주문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뭔가 손해 보는 듯하고, 야무지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으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알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다르다고 말하고 싶지만, 여전히 나는 사람들의 말에 쉽게 휘둘리곤 한다. 나의 시간과 돈을 투자했다면 누가 봐도 혜택을 최대로 누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느긋하게 흘려보내는 여행을 하기 위해 떠나온 이곳에서조차 말이다.

 

 리스본을 여행하는 외국인들이 대부분 구입한다는 "리스보아 카드"는 리스본 시에서 발행하는 도시관광카드이다. 대표 관광지들의 입장권과 교통권이 함께 묶여 있는 카드로 24시간권(27유로), 48시간권(44유로), 72시간 권(54유로) 이렇게 세 종류가 있다. 날짜로 구분되는 게 아니라 시간으로 구분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여행 일정에 맞는 적절한 티켓으로 구매해서 요령껏 동선을 잘 짜면 허투루 보내는 시간 없이 꽉꽉 채워 관광할 수 있다.


 나는 리스본에서 12일을 머물기 때문에 꽤 고민스러웠다. 리스보아 카드가 과연 필요한가, 구입한다면 몇 시간 권을 사야 하나, 산다면 언제 개시해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 중에 하나투어 사이트에서 24시간 권 1장 가격에 2장을 주는 특가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알뜰한 소비자라면 응당 놓칠 수 없는 기회였기 때문에 필요성에 대한 고민은 제쳐두고 부랴부랴 티켓을 구입했다. 이왕 구입한 거니까 본전보다 더 남는, 최대치를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스케줄을 짜보고 싶었다. 그래서 리스보아 카드를 활용해서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곳, 대중교통으로 이동해야 하는 곳들을 모두 모아 이틀 치의 일정으로 구성했다. 나에게 필요한 소비인가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처럼, 내가 정리한 리스트 속 관광지들이 내가 진짜 가고 싶은 곳인지 역시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그전까지 리스본의 언덕들을 부지런히 걸어 다녔기에 이미 다리는 퉁퉁 부어 있었고 지나치게 빡빡한 일정으로 두통이 도질 지경이었지만, 나는 가성비 넘치는 여행을 포기하지 못하고 열심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고대박물관이나 아주라 궁전 같이 카드가 없었다면 가볼 생각조차 않은 곳들도 꼭 들렀다. 우습게도 리스보아 카드를 손에 꼭 쥔 채 평소에 가장 싫어한다고 부르짖었던 그런 여행을 내가 하고 있었다.   


  한 치의 손해도 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출발한 일정들이 나에게 무슨 감흥을 주었겠는가. 발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부지런히 돌아다녔던 곳들 중 기억에 남는 곳은 겨우 두어 곳뿐이었고, 그마저도 바삐 이동하느라 느긋하게 즐기지 못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내가 지금 대체 무얼 하고 있는가 자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낯선 곳에서 일상을 살아내고 싶어 했던 느릿느릿 여행자가 똑똑하고 야무진 소비자에게 장렬하게 패배하고 말았다는 것을 아프게 깨달았다. 단지 그곳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의 여행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다음날은 작정하고 늦잠을 잤다. 빡빡한 일정에 몸도 지쳤지만 스스로가 못마땅해 느꼈던 정신적 스트레스도 컸다. 뽕을 뽑기 위해 내달렸던 이틀이 있었으니 하루쯤은 맘 편히 공쳐도 될 것 같았다. 어차피 꼭 해야만 하는 일은 만들지 않기로 했던 여행이었다. 언제든 내 마음대로 계획을 틀어버리고 싶어서 떠난 혼자 여행이었다. 출출해진 배를 채우려 따뜻한 커피와 나타를 사들고 아파트로 돌아오는데 어느새 자기혐오는 사라지고 행복한 편안함이 차오르고 있었다. 오늘은 하루종일 침대에서 노닥거리며 책을 읽어야지. 저녁에는 근처에서 피자나 포장해 와서 맛있게 먹어야지.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삶의 여러 순간들에 살아온 관성 때문에 종종 같은 실수를 반복하곤 하지만, 나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 어제 같은 치열한 하루가 주는 뿌듯함보다 오늘 같이 느긋한 하루가 주는 여유가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물론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 조금 더 나아가는 선택이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강렬함을 선사해 줄 때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어제와 같은 시간은 진짜가 아니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여행지에서 저울질하지 말기. 그냥 조금 더 행복해지는 선택을 하기.


 다시 한번 리스보아 카드가 나에게 준 교훈을 잊지 말아야겠다 다짐해 본다.






이전 06화 낯선 도시를 홀로 여행한다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