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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름끈 Jun 21. 2024

이곳은 세상의 끝, 호카곶

To Portugal 8) 리스본 근교투어 - 호카곶 + 오비두스

* Sawu bona(사우보나) : 아프리카 줄루족의 인사말. '나는 당신을 봅니다'라는 뜻. *


 그날은 '신트라'와 '아제나스 두 마르'로 떠나는 날이었다. 신트라는 리스본에서 1시간 내외로 갈 수 있는 거리인데, 마침 주말이라 신트라 역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 도시의 대표 관광지들은 역에서 거리가 꽤 있어 버스나 우버를 이용해야 갈 수 있다. 그래서 일단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했는데, 웬 아저씨가 "Cash No No!"를 큰소리로 외치며 신트라 시내버스 통합권을 구입하기를 권하고 있었다. 현금으로는 탈 수 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통합권이 더 나으니까 이걸 사라는 말인가. 아저씨에게 다가가 질문하고 싶었지만 통합권을 사려는 외국인들이 아저씨에게 몰려들어 매우 바빠 보이셨다. 음, 어쩐담. 통합권까지 살 정도로 많이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 같은데...



 설상가상으로 날씨가 흐려지고 바람도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이런 날씨라면 절벽 마을인 '아제나스 두 마르'에 가도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야 뭐 급할 게 있겠는가. 아직 일정을 시작하기도 전이지만 내향형 인간인 나는 갑작스러운 인파에 진이 좀 빠지기도 해서 버스 줄에서 물러났다. 역 앞 카페로 들어가 따끈한 커피를 한 잔 사들고 나와 사람들을 구경하며 심드렁하게 역 주변을 산책했다. 그때 마침 내 앞에 버스가 한 대 도착했다. 호카곶(Cabo da Roca)으로 가는 버스였다. 기사에게 현금을 내도 되냐고 묻자 호탕한 웃음과 함께 나는 현금만 받는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 웃음에 이끌려 세상의 끝을 향해 달리는 버스에 올라탔다. 처음 일정을 계획할 때 해안가에 덜렁 기념비만 하나 있다고 해서 배제한 곳이었다.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기념비 앞에서 사진이나 찍고 오지 뭐.  


 어쩌면 곧 멀미를 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올 무렵에서야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이동 중에도 날씨는 계속 오락가락했는데, 막상 호카곶에 도착하니 하늘이 맑게 개였다. 그래 우연이(아니면 운명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이 정도 풍경은 보여줘야지. 탁 트인 바다와 하늘이 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세상의 끝 호카곶

 

 호카곶은 유라시아 대륙 최서단에 위치한 곳이다. 애초에 그 상징적 의미를 기리는 곳이라 볼거리, 즐길 거리가 많진 않다.(그래도 일몰이 유명하며, 약간의 금액을 지불하면 세상의 끝에 도착했다는 증명서도 발급해 준다.) 하지만 이곳이 15세기 이후 대항해시대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포르투갈이라 더 특별한 공간으로 다가온다. 유럽인들은 여기를 세상의 끝이라 불렀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이 또 다른 세상의 시작일 수 있음을. 모험과 도전을 결심한 이들은 바다를 앞에 두고 무엇을 떠올렸을까. 그들이 꿈꿨던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대서양을 향해 돌진하는 듯한 지형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진지한 상념에 빠지는 것도 잠시, 볼이 얼얼해지고 몸이 비틀거릴 정도의 세찬 바람은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묶으면 금세 머리끈이 날아가고 모자를 깊게 눌러써도 계속 벗겨지기만 했다. 기념사진 속 나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힘겹게 부여잡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살면서 이 정도로 강한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냈던 적이 없어 난데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거센 바람이 나를 바다 쪽으로 밀어내서 순간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이 바람을 탄다면 어디든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도 생겼다. 이 바람과 함께라면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나는 어디로 가닿기를 바라고 있는가. 나도 모르게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세상을 들여다보고 도달하고 싶은 세상을 그려보게 되는 시간, 이 시간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호카곶에 들른 보람이 있었다. 그래. 모름지기 세상의 끝이란 이렇게 특별한 곳이지.


파노라마로 담아낸 호카곶의 풍경




[After]


+

 리스본 근교 여행지로는 신트라, 카스카이스, 아제나스 두 마르, 호카곶, 오비두스 등이 자주 거론된다. 호카곶을 방문했던 날 오후 다양한 매력을 지닌 성들을 구경할 수 있다는 신트라 시내도 둘러보았다. 내가 방문한 곳은 페냐성과 헤갈레이아 별장. 호카곶에서 바람을 많이 맞고 버스도 꽤 타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날씨 또한 다시 오락가락해서 두 곳 모두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입장료가 아까울 정도로 빠른 시간 안에 일정을 마무리한 후 리스본으로 돌아와 따끈한 스튜에 와인을 한 잔 곁들였다.

 

++

 반나절 안에 도시를 모두 둘러볼 수 있는 여행지로는 오비두스(Óbidos)를 추천한다. 구석구석 살펴봐도 2-3시간이면 충분하다.  


 오비두스는 역대 포르투갈 왕들이 자신의 여왕에게 선물로 하사했다는 사연이 있는 작은 소도시로, 그런 핑크빛 사연 때문인지(당시의 결혼 제도는 핑크빛 운운하기에는 좀 그렇겠지만) 도시 전체가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다. 날씨만 좋다면 사진 찍기 아주 좋은 곳이다.


오비두스 시내 풍경

 

 포르투갈의 겨울은 선글라스와 우산을 둘 다 챙겨 다녀야 하는 변덕스러운 날씨가 많다. 오비두스로 향했던 날도 가는 내내 비가 흩뿌렸다. 버스에서 내리니 다행히 비는 그쳤지만 도시 전체가 안개에 휩싸여 있어 다소 처연하고 스산한 느낌이었다. 성곽에 올라가서 마을 전체와 자연 풍광을 함께 조망할 수도 있지만 빗물로 인해 미끄러워 보여 도전하진 않았다. 오비두스에서만 살 수 있는 멋스러운 소품들이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비싼 느낌이니 특별한 디자인이 아니라면 리스본 시내 상점에서 구입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음식도 커피도 평범하다고 해서 난 아침 일찍 출발해서 점심은 리스본에서 먹었다. 근교 여행을 짧게 하고 싶은 분들, 예쁜 곳에서 사진 찍기를 즐겨하시는 분들이라면 만족할만한 곳인데, 꼭 날씨가 좋을 때 가시길- (7월에 축제가 있다고 하니 그때 가세요!)


마을 초입에 있는 군밤은 추천. 껍질을 모으는 곳이 따로 있는 봉투가 신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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